카를 4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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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4세'''({{llang|cs|Karel IV.}}, {{llang|de|Karl IV.}}, {{llang|fr|Charles IV}}, [[1316년]] [[5월 14일]] [[프라하]] ~ [[1378년]] [[11월 29일]] [[프라하]])는 [[보헤미아]]의 국왕([[1346년]] ~ [[1355년]])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1355년]] ~ [[1378년]])이다. [[룩셈부르크 왕가]] 출신이며 보헤미아의 국왕 '''카렐 1세'''({{llang|cs|Karel I.}})에 해당한다.
 
== 유년 시절 ==
카를 4세는 보헤미아 왕 [[바츨라프 3세]]의 여동생 [[엘리슈카 프르셰미슬로브나]]와 보헤미아 왕 [[얀 루쳄부르스키]]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독일어식으로는 '''벤첼''', 체코식으로는 '''바츨라프'''였다.
카를 4세는 보헤미아 [[프라하]]에서 보헤미아의 [[얀 루쳄부르스키]] 국왕과 그의 아내인 [[엘리슈카 프르셰미슬로브나]](Eliška Přemyslovna)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카를 4세의 어머니인 엘리슈카는 [[프르셰미슬 왕조]] 출신인 [[바츨라프 3세]] 국왕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카를 4세의 본명은 자신의 외조부였던 보헤미아의 [[바츨라프 2세]] 국왕에서 이름을 딴 '''바츨라프'''({{llang|cs|Václav}}, {{llang|de|Wenzel|벤첼}})였지만 나중에 성장하면서 자신의 삼촌인 [[프랑스]]의 [[샤를 4세]](Charles IV) 국왕에서 이름을 딴 '''카를'''로 개명하게 된다.
그는 [[1356년]] [[금인칙서 (1356년)|금인칙서]]를 공포하여 독일 7선거후를 정하고, [[독일의 군주|독일 국왕]]의 선거제를 확정하였다. 그는 영토를 넓히는 일보다 [[보헤미아]]의 통치에 더 힘을 기울였고, 젊을 때 [[파리 (도시)|파리]]에서 공부하여 높은 교양을 몸에 지녀, 독일 최초로 [[프라하]]에 대학을 세웠다.
 
카를 4세는 어린 시절에 프랑스의 샤를 4세 국왕의 궁정에서 7년 동안 거주하면서 프랑스식 교육을 받았으며 [[라틴어]], [[체코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5개 언어를 구사했다. [[1331년]]에는 아버지와 함께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고 [[토스카나 주|토스카나]] [[루카 (토스카나 주)|루카]]의 지배자를 역임했다. 1333년에는 토스카나에 "카를의 산"이라는 뜻을 가진 [[몬테카를로 (토스카나 주)|몬테카를로]] 요새를 설립했다.
 
1333년에는 시력이 약화되면서 국정을 수행할 수 없게 된 얀 국왕을 대신해서 [[보헤미아 왕국]]의 통치자로 즉위했다. 1334년에는 [[모라바]] 변경백 칭호를 받았고 1336년에는 [[티롤 주|티롤]] 정부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 로마왕, 보헤미아의 국왕 ==
[[1346년]] [[7월 11일]]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루트비히 4세 (신성 로마 제국)|루트비히 4세]] 황제와 대립 관계에 있던 [[교황 클레멘스 6세]]와의 동맹 관계를 수립했다. 이를 계기로 카를 4세는 클레멘스 6세 교황으로부터 루트비히 4세의 [[대립왕]]으로 추대되었다. 1347년에는 클레멘스 6세 교황으로부터 상당 부분의 영토를 교황령으로 편입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카를 4세는 [[선거 군주제]]를 통해 선출된 군주였기 때문에 독일에서는 그의 입지가 약한 편이었다. 카를 4세는 "성직자왕"(Pfaffenkönig)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었는데 신성 로마 제국의 여러 주교들과 도시들은 여전히 루트비히 4세 황제를 지지하고 있었다. 1346년 8월에 일어난 [[백년 전쟁]]의 [[크레시 전투]]에서는 아버지인 얀과 함께 전투에 참전했지만 아버지인 얀은 전사했고 카를 4세는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도망쳤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1347년 10월 11일에 루트비히 4세 황제가 사망하면서 카를 4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유일한 로마왕이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에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한 카를 4세는 [[1347년]] [[9월 2일]]에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흑사병]]이 확산되지 않았던 보헤미아의 [[프라하]]를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 보헤미아의 수도로 정한 카를 4세는 프랑스 [[파리 (프랑스)|파리]]를 모델로 한 도시 재건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프라하의 신 시가지인 [[노베메스토]](Nové Město)를 건설했다.
 
[[1348년]]에는 프라하에 자신의 이름을 딴 중앙유럽 최초의 대학교인 [[프라하 카렐 대학교]]를 설립했다. 이를 계기로 프라하는 중앙유럽의 문화, 교육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된다. [[1353년]]에는 [[룩셈부르크]] 백작을 역임하고 있던 자신의 이복동생인 [[벤첼 1세 폰 룩셈부르크 공작|벤첼 1세]]의 작위를 룩셈부르크 공작으로 격상시켰다. 1355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보헤미아의 법률인 《마이에스타스 카롤리나》(Maiestas Carolina)를 제정하려고 했지만 보헤미아 의회에서 부결되고 만다.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
카를 4세는 [[1354년]]에 군대 없이 [[알프스 산맥]]을 횡단하면서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1355년]] [[1월 5일]]에는 [[밀라노]]에서 대관식을 치르면서 [[랑고바르드의 철관]]을 받았고 1355년 [[4월 5일]]에는 로마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치렀다. 카를 4세는 어떠한 문제 없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했고 알프스 산맥을 거쳐 프라하로 귀환하게 된다.
 
[[1356년]] [[1월 10일]]에는 총 31장으로 구성된 신성 로마 제국의 [[금인칙서 (1356년)|금인칙서]]를 공포했다. 이에 따라 [[서임권 투쟁]] 이후에 전개된 [[교황]]의 간섭 없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선출이 가능해졌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7명의 선제후([[마인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쾰른]] 대주교, [[보헤미아]] 국왕, [[팔츠]] 백작, [[작센 주|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주|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상속 및 특권이 확립되었다.
 
[[1376년]]에는 자신의 아들인 [[바츨라프 4세]](벤첼 4세)가 로마왕으로 선출되도록 노력했고 [[1378년]]에는 슈바벤 도시 동맹과 귀족들 간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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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arl IV HRR.jpg|체코 프라하에 건립된 카를 4세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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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