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백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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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읍|장안면]](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좌천리에서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최원봉]]과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고등학교백호가는 졸업일름은및압버머니최워봉의으슷승이학 정치적 가정 형편 및 어머니의 죽음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969년도지였던 범부6기정설[[경상남도|경]]선생이 [[창원시|창원]]징엊준언이름읻운드 언더그라운드 라이브 클럽에서 가수로 첫 데뷔하였고 1973년부터 1976년까지 [[국방의 의무|대한민국 육군 사병으로 군 복무]]하였으며 1976년 제대 후 부산 음악살롱 무대를 전전하던 중 [[하수영]]의 인연으로 [[서울]]로 상경하여 가수로 데뷔하였다. 데뷔곡은《내 마음 갈 곳을 잃어》라는 곡이 발표되었으며 3개월만에 6,000장이 판매돼 가요계에 최백호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78년에는 독특한 창법으로 연이은 히트를 하여 정식 데뷔 1년여만에 톱 가수 반열에 올랐다. 가요제가 한창 무르익을 1979년에는 인기 포크 록 그룹 [[산울림]], [[사랑과 평화]], 인기 가수 [[김만준]], [[전영]] 등과 함께 대학가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가요계를 휩쓸며 주류를 이루던 [[트로트]] 가요를 밀어내고 새바람을 일으켰다. 데뷔와 동시에 전성기를 누비던 최백호는 1980년 당시 국민배우 [[김자옥]]과 결혼하였고《영일만 친구》라는 곡으로 TBC 방송가요대상 남자가수상을 수상하였다. 1983년에는《고독》이라는 곡으로 [[MBC]] 10대 가수상, [[KBS 가요대상]] 남자가수상을 수상하여 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김자옥과 이혼한 후 큰 시련을 겪었다. 1984년 재혼한 후 다시 안정을 찾아 복귀하였다. 1987년에는 [[삼각산]] [[경국사]]에 들어가 가수로서의 마지막 승부를 걸고 작곡에 전념하였지만 1년후《시인과 촌장》을 끝으로 1989년 1월 [[미국]]으로 이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잠시 한인방송 라디오코리아 DJ로 활동하며 지냈다. 그 후 1990년 2월에 다시 귀국하였고 공연 관련 활동을 재개하였으며, 1991년 3월 [[1991년 대한민국 지방 선거|지방 선거]]에서 [[무소속]] [[서울특별시의회|서울특별시 의회 의원]] 후보 출마하였지만 낙선하였고 이후 1995년 삶의 허무와 지나간 시간에 대한 미련을 담은《낭만에 대하여》라는 곡이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최백호/내가슴 적시는 우수의 노래(가요현대사:28)|출판사=한국일보|날짜=1996-01-24|확인일자=2009-05-18|저자=권오현 기자}}</ref>
 
== 가족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