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프랑스 관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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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기조는 세실을 베트남으로 보내어 가톨릭교회 선교사인 도미니크 르페브르([[:en:Dominique Lefèbvre|Dominique Lefèbvre]]) 주교를 구출해 오도록 했다.(1845년) <ref name="Chapuis"/> {{Rp|5}} 1847년에 즉위한 [[뜨득]] 황제도 선대에 이어 보수주의와 쇄국정책을 펼쳤다. 1847년, 2명의 프랑스인 선교사들(베트남에 은밀히 들어갔다가 2번째로 수감된 도미니크 르페브르 주교와 뒤클로스)이 수감되자 이들을 구출하고, 베트남에서의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얻어내기 위하여 <ref name="Tucker"/> {{Rp|28}} 세실은 2대의 전함(글르와르, 빅토리외즈)과 라피에르(Augustin de Lapierre) 대령을 다낭에 보냈다. <ref name="Chapuis"/> {{Rp|5}} 만약 라피에르 대령이, 르페브르 주교가 이미 자유의 몸이 되어 [[싱가포르]]로 가는 길이었다는 점을 미리 알았더라면, 라피에르는 베트남의 배들의 마스트를 해체함으로써 공격을 개시하지 않았을 것이다.<ref name="Chapuis"/> {{Rp|5}} 협상이 아무 성과없이 결렬되자 결과적으로 1847년 4월 14일, 프랑스는 다낭 항에 정박중이던 나머지 다섯척의 황동 갑판으로 되어 있는 배들을 침몰시키는 공격을 이어갔다. <ref name="Chapuis"/> {{Rp|5}} 1847년 4월 15일, 프랑스 함대와 베트남 배들간의 전투(다낭 폭격)가 벌어져, 베트남 배들중 세 척이 침몰하고 프랑스 함대는 도망쳐 나왔다. <ref name="Tucker"/> {{Rp|28}}
====나폴레옹3세====
한편,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1851년)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프랑스가 동아시아에 세력을 확장하지 않는다면 2류 국가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프랑스가 문명화된 서구 문화를 전파해야 할 임무를 띠고 있다는 사상이 퍼져 있었다. 결국 프랑스의 베트남 진출은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목적이었다.<ref name="신승하"/>{{Rp|335~337}}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는 [[영국]]과 연합하여 [[제2차 아편 전쟁]]([[1856년]]~[[1860년]])을 치르는 한편 <ref name="신승하"/>{{Rp|335~337}} 인도차이나에 프랑스 식민지를 구축하기 위한 단계들을 밟아 나갔다. [[스페인]] 출신의 [[호세 마리아 디아스]]([[:it:José María Díaz Sanjurjo|San Jose María Díaz Sanjurjo]]) 신부가 베트남에서 순교하자 ([[1857년]] [[7월 20일]], →[[:en:Thomasian Martyrs|Thomasian Martyrs]])<ref>{{웹 인용|url=http://www.saintwiki.com/index.php?title=OP_Calendar/Martyrs_of_Vietnam |title=OP Calendar/Martyrs of Vietnam}}</ref>, 그는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에 대한 베트남의 박해에 응징하고 베트남 조정에 프랑스군의 베트남 주둔을 강요하고자 전쟁의 개시를 승인([[1858년]])하였다. 이로써 1858년부터 베트남과 프랑스는 전쟁에 돌입하였다. [[프랑스 해군]]은 [[리고 드 주누이
=== 홍 강 통상 문제와 북부 베트남 공략(1867년~188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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