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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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식민 지배 ==
[[파일:InaugSG.JPG|thumb|250px|철도개통식(사이공-[[촐롱]])]]
[[산업혁명]]을 경험한 유럽에서는 통상무역의 확대를 요구하며 아시아 시장으로 진출하였다. 베트남도 구미 열강의 제국주의의 손길을 피해갈 수 없었다. 17세기 초기에 베트남에 통상을 요구하는 사자가 방문했다. [[응우옌 왕조]] 성립 직후인 1804년, 영국사절 로버츠가 통상관계의 개선을 요구하면서 다낭을 내항하고 있었다. 그리고 1832년에는 미국으로부터의 사절, [[에드먼드 로버츠]]도 유사한 목적으로 내항을 했지만, 거절되었다.베트남의 독립은 아시아 식민지 사업의 첫 발을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내딛었던 프랑스에 의하여 서서히 잠식되었다. 베트남이 프랑스의 통상 교섭 요구를 거절하고, 가톨릭 교도를 박해하자,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전쟁을 일으켜 1862년 베트남의 항복을 받아내고 남부 베트남 3개주([[코친차이나]])를 할양받은데 이어, 타이와 미얀마를 제외한 [[인도차이나 반도]](즉, 현재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식민지화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1885년)를 세웠다. 이로써 베트남 전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포함되었다. 프랑스는 베트남 사회에 뚜렷한 정치적 및 문화적 변화를 가져온다. 근대 교육의 서구적인 체계가 도입되고 베트남 사회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응우옌 왕조#프랑스와의 항쟁|프랑스에 대한 응우옌 왕조의 항쟁]])
 
[[담배]], [[인디고]], [[차 (음료)|차]], [[커피]]의 수출을 촉진할 목적의 플랜테이션 경제를 발전시키면서 프랑스는 자치와 시민권의 요구를 대개는 무시하였다. 이에 대해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려는 베트남인의 독립투쟁은 끊이질 않았다.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기대를 한 베트남 청년 [[호찌민]]은 종전회담이 열리던 [[베르사유 조약]]에 베트남 대표로 참석하려 했으나 참석을 거절당했고, 그는 식민지를 고수하는 자본주의 열강보다는 제국주의를 반대하며 새롭게 탄생한 [[소련]]과 [[코민테른]]에 기대를 걸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