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Venusjina (토론 | 기여)
→‎죽음: 내용추가
태그: m 모바일 앱
편집 요약 없음
113번째 줄:
=== 생애 후반 ===
==== 개혁의 실패 ====
[[파일:서울 마포 고려 공민왕 내외 영정.jpg|thumb|right|200px|[[조선]] 종묘 내에 있었던 고려 공민왕 내외 영정. 조선 건국후 [[이성계]]는 [[조선]]건국을 정당화시킬 목적으로 고려 공민왕 내외의 영정을 그려 [[조선]]의 종묘에 봉안하였다. 이는 고려는사실 공민왕에서고려가 공민왕 대에서 끝났다는 의미이기도의미를 담고 하다있다.]]
 
홍건적과 왜구의 계속적인 침범은 고려의 국력을 소모시켰다. [[1365년]](공민왕 14),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던 [[노국대장공주]]가 드디어 회임을 하였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는 난산 끝에 사망하고 말았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에게 극심한 충격을 주었다. 그는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통곡했고, 정자를 돌보지 않았다. 노국대장공주는 인덕왕후(仁德王后)로 추존되었으며, 공민왕은 서거한 왕후를 추모하는 불사(佛事)에 전력을 기울였다. 왕비의 사후 그는 술과 섹으로여색으로 시름을 달랬고,예쁜 여자들을 왕궁으로 출입시키기도 했다달랬다.
 
끝없는 상심에 빠졌던 공민왕은 [[1365년]] 음력 5월 [[을사환국]](乙巳換局)을 통해 [[신돈]](辛旽)을 등용하였다. [[영산]] 출신 승려였던 [[신돈]]은 당시 살아있는 부처라는 소문이 있었고 그 소문을 들은 공민왕은 직접 영산까지 내려가 [[신돈]]과 만나 대담하였으며, 신돈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시국을 논하였는데 그의 달변이 왕의 마음에 들게 된다. 왕은 신돈을 환속시킨 뒤 수정리순론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책록하고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使司) 판감찰사사(判監察司事)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 판서운관사(判書雲觀使)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에 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