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보니파시오 9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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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에서는 [[존 위클리프]]가 교황이 주교직이나 아빠스직 등 높은 지위나 좋은 성직록이 공석이 될 때 교황이 자신의 이익이나 호감을 고려하여 마음에 둔 후임자들을 미리 정하는 관례에 대해 반대사면서 교황에 적대적인 설교를 하였다. 보니파시오 9세는 annates perpetuæ라는 수익을 도입해서 로마 교황청으로 하여금 모든 성직록의 첫 해 수입 절반을 저축하게 하였다. 교황의 대리인들은 또한 단순히 공석인 자리의 성직록만 판매한 것이 아니라 공석이 예정된 자리의 성직록까지 판매하였다. 그리고 성직록을 판매한다 해도 다른 사람이 그 성직록에 대해 더 많은 액수를 제시한다면 교황은 먼저 판매한 것을 무효화하였다. 당시 니하임의 디트리히는 같은 성직록이 일주일에 여러 번 팔리는 것을 목도하였고, 심지어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던 와중에 자기 비서들과 사업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냉혹하게 기록하였다. 서구 대이교 기간 동안 교황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잉글랜드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잉글랜드 의회는 잉글랜드 성직 후임자법과 교황 존신죄법을 승인하고 확장했으며,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잉글랜드 영토 안에서의 교황 임명권에 대한 비토권을 부여했다. 보니파시오 9세는 잉글랜드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하여 뒤로 물러났으며, 오랜 논쟁 끝에 마침내 잉글랜드 왕이 흡족할 만한 소득을 얻었다. 그렇지만 1396년 런던 시노드에서 잉글랜드의 주교들은 위클리프를 단죄했다.<ref name="Catholic"/>
 
독일에서는 1400년 8월 20일 선제후들이 렌스에서 회합을 가져 쓸모 없는 [[바츨라프 4세]]를 독일 국왕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바이에른 공작 [[루프레히트]]와 [[궁정백]] 라인을 새 독일 국왕 후보자로 골랐다. 1403년 보니파시오 9세는 바츨라프 4세와 퇴위와 새 국왕으로 루프레히트를 인정함으로써 상황을 최대한 활용했다.<ref name="Catholic"/>
== 생애 ==
그는 정치적인 확립과 재정적인 복구에 힘썼다.
 
1398년과 1399년에 보니파시오 9세는 술탄 [[바예지드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하자 그리스도교 유럽 국가들에게 [[동로마 제국|동로마]] 황제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를 도울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는 예전과는 달리 십자군 원정에 대한 열기가 거의 식은 상황이었다. 1391년 10월 7일 보니파시오 9세는 [[스웨덴의 비르지타]]를 시성했다. 보니파시오 8세의 도움으로 1391년에는 페라라 대학교가, 1398년에는 페르모 대학교가, 1392년에는 에르푸르트 대학교가 세워졌다.<ref name="Catholic"/>
[[영국]]도 교황청에 대힌 충성심을 보였으나 불안정하였고 [[시칠리아]]와 [[제노바]]는 교황청으로부터 떠나갔다. 또한 보니파시오 9세는 [[독일]]에서 벤첼([[바츨라프 4세]]) 왕을 반대하는 [[루프레히트]]와 [[헝가리]]의 [[지기스문트]]를 반대하여 나폴리 편을 들어야만 하였다. 이런 세속적인 일들은 교황청의 재정을 바닥나게 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재정 충당을 강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성직록에 임명한 사람들에게 과세를 강요하였고 경매자들에게 높은 지위를 주었으며 1390년과 1400년에는 면제 지역을 팔고 전대사를 발매하여 재정적인 충당을 강행하였다. 후에 [[대립 교황]]이 되는 [[대립교황 요한 23세|발다사레 코사]]의 지원을 받는 듯하였으나 성직매매와 같은 그의 방법은 보니파시오 9세를 더욱 파탄에 빠지게 하였다. 이리하여 그의 재위는 '보니파시오 9세의 음흉한 날들'이라는 말을 남기게 하였다.
 
보니파시오 9세는 잠시 병을 앓다가 1404년에 선종했다.<ref name="Catholic"/>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