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리비에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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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은 〈지교 전투〉에서 리비에르의 시체를 남겨두고 퇴각해야 했으며, 몇 달 동안 그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상황을 확신하지 못했다. 어깨에 총을 맞고 리비에르가 쓰러졌고, 일어났다가 다시 쓰러졌다. 그의 드러누운 시체에 흑기군 군인들이 매듭을 둘렀다. 리비에르의 동료 장교 대부분이 자연스럽게 그가 총격을 당했거나, 칼에 찔려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많은 베트남인들은 그가 흑기군에 의해 산 채로 포획되었다고 믿었다. 당시 전투에 참가했다는 베트남 군졸의 주장에 의하면, 전투가 끝난 직후에 리비에르가 유영복의 면전에 끌려갔고, 그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의해 친한 친구를 잃은 흑기군 지도자 중 한 명의 명령에 의해 참수되었다고 전한다. 그의 죽음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확인된 바는 없었다.
 
전투가 있은 지 몇 주가 지난 뒤, 프랑스 군은 리비에르의 시신이 푸호아이에 있는 흑기군 요새 근처에 잔인하게 난도되어 매장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1883년 9월 18일, 베트남 정보원으로부터 받은 정보를 바탕으로 프랑스는 해군 보병 2개 대대로 그 지역을 정찰했다. 리비에르의 찢어진 머리와 손은 칠기상자 속에 넣어져 매장되어 끼엔 마이 마을에서 발견되었다. 3주 후인 5월 19일에 해군 제복을 입은 난자된 유럽인의 시체가 리비에르가 쓰러졌던 지교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시체는 칼로 깊이 난자되어 있었으며, 머리와 손이 사라져 있었다. 해군 제복 소매는 계급 자국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잘려 있었다. 리비에르를 잘 아는 몇몇 프랑스 해군 장교들은 그 시체가 실제로 그의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리비에르가 지교의 전장에서 전투의 열기 속에서 사망했다는 점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었다. 유영복은 프랑스 장교들의 목에 상당한 현상금을 걸었으며, 계급에 따라 등급을 매겼다. 따라서 흑기군이 부상당한 프랑스 지휘관을 살해한 후, 현상금을 타내기 위해 계급을 확인시키려 계급장이 있는 손목까지 잘라내고, 목을 벤 것처럼 보였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