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독립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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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단 ==
[[파일:Easter_Proclamation_of_1916.png|섬네일|left|thumb왼쪽|1916년 부활절 선언.<br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주요 심벌 중 하나.)]]
순수한 아일랜드 공화주의자에게 영국-아일랜드 전쟁은 [[1916년]]의 [[부활절 봉기]]에서의 선언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공화주의자들은 1919-21년(그 다음해에는 [[아일랜드 내전]]이 일어났다.)간의 충돌은 자신들의 공화국을 파괴시키려하는 행위에 대한 방어였다고 주장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영국-아일랜드 전쟁의 발단이자 원인은 [[일방적 독립선언]]을 한 독립 [[아일랜드 의회 (1919년)|아일랜드 의회]]에 있다.
[[아일랜드 제헌의회]] 내각은 아일랜드의 독립을 선언하고 IRA에 전쟁을 개시할 것을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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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3월, 서 리머릭에서 IRA는 밀정을 하던 남자를 처음으로 살해하였다. 4월 초, 400여 개의 버려진 왕립 아일랜드 보안대 병영이 다시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불태워졌다. 며칠후, [[마운트조이 교도소]]의 죄수들은 [[정치범|정치적 지위]](자신들의 석방)를 위해 단식 투쟁을 시작했다. 투쟁은 더블린에서의 대규모의 시위를 이끌어냈다. 이 혼란상황으로 인해 죄수들이 모두 석방되었다. 합동 경비대는 죄수들의 석방을 축하하던 밀타운 멀베이에 모여있던 비무장 상태의 군중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해 수 명의 사상자를 냈다. 주 검시관은 9명의 군인과 경찰을 살인죄로 선고했으나 징계는 이뤄지지 않았다.
 
[[파일:Éamon de Valera.jpg|thumb섬네일|left왼쪽|이몬 데 발레라]]
[[아서 그리피스]]는 통계 자료를 통해 영국군이 처음 18개월간 무고한 민간인 주택들을 상대로 38,720건의 약탈행위를 벌였으며 4,982명에게 폭력 혐의를 씌워 연행했고, 1,604명에게 폭력 행위를 가했다고 했다. 또한 영국군은 102곳의 마을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불태웠으며 77명의 무고한 비무장 민간인과 공화주의자들을 학살했다고 밝혔다. 그리피스는 [[의회 법정]]에 문제를 제기했으며 이 일은 IRA의 영국군에 대한 폭력행위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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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반응 ==
<!-- [[파일:Sirjohnfrench.jpg|thumb섬네일|[[존 프렌치, 제1대 이프로 백작|프렌치 공]]]] -->
[[블랙 앤 탄스]] 부대가 괴멸 상태에 이른 RIC를 지원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BaT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7,000여 명의 건장한 영국군들로 이뤄져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왔다. 공식적으로 그들은 RIC의 하위조직이었으나 실제로는 살인, 테러를 일삼고 술주정을 부리며 어설픈 훈련을 받은, 아일랜드에서 활동하는 어떤 조직보다도 더 영국 정부의 도덕성에 악영향을 끼친 준군사조직이었다. 얼마 후에는 퇴역한 1,400여 명의 예비역 영국군 장교들이 왔다. BaT가 아일랜드인들을 상대로 수많은 폭력과 테러를 일삼자 아일랜드인들의 반발은 더 심해졌다.
 
1920년 11월 21일 콜린스의 부대는 [[카이로 갱]]으로 알려져 있는 19명의 영국정보원들을 더블린 인근에서 살해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BaT는 풋볼 경기가 한창 진행 중이던 [[크로크 공원]]을 향해 트럭을 타고가서 무차별 발포를 했다. 14명의 비무장 민간인들이 사망했고 65명이 부상당했다. 이 날은 [[피의 일요일 (1920년)|피의 일요일]]로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 크로크 공원의 스탠드는 호건 스탠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는 당시 사건 도중 숨진 [[티퍼러리]]팀 소속의 선수를 기리기 위해서이다.
 
[[파일:S. Hogan - Flying Column No. 2, 3rd Tipperary Brigade, IRA - 1921.JPG|300px섬네일|thumb왼쪽|left300px|션 호건의 플라잉 칼럼]]
 
[[코르크 카운티]]에서도 더블린에서와 같은 유혈이 낭자하는 싸움이 벌어졌다. 영국군은 IRA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공화주의자들을 살해하고 민간인들의 집을 방화하고 약탈하는 등의 전술을 사용했다. 1920년 3월, [[신페인당]]원이자 [[코르크 카운티의 지도자]]인 [[토머스 맥 컬틴]]이 그의 집에서 아내가 보는 앞에서 총살을 당했다. 범인은 검은 복면을 하고 있었으며 지역 방위대 병영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컬틴의 후임은 [[티런스 맥스위니]]였다. 그는 런던에서 [[브릭스턴]] 수감자들이 벌인 [[단식 투쟁]] 참가자 중 한 명이었다. 1920년 12월 11일 코르크의 중심부는 영국군에 의해 불탔으며 파괴되었다. 또한 이들은 소방관들이 화재를 진압하려는 것을 방해했다. 이날의 사건은 IRA의 공격에 대한 영국군의 보복성 공격이었다.
 
코르크 카운티에서 처음으로 "플라잉 칼럼"가 등장했다. 이들은 100여 명으로 이뤄진 기동부대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의 지형을 영국군보다 더 잘 아는 이점을 이용해 매복 공격 등의 전략을 펼쳤다. 일부 영국군 연대가 비무장 포로들을 죽였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에식스 연대]]는 이들 중 하나였다. 더블린에서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1920년 11월 28일, [[탐 베리]]가 이끄는 IRA 소속 서부 코르크 부대는 Kilmicheal에서 영국군 정찰대를 향해 매복공격을 가해 18명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아일랜드 독립 전쟁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곧 전쟁규모의 확대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서부 코르크 Flying columns는 [[크로스베리]]에서 영국군과 Black and Tans에 맞서 다시 한번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IRA는 단지 3명만이 피해를 입었는데 비해 영국군은 60여 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많은 병사들이 다쳤다.
[[파일:Dublin custom house 2.jpg|thumb섬네일|200px|[[더블린]]에 있는 [[커스텀 하우스]].<br />1921년 IRA가 파괴했으나 후에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가 재건축했다.]]
 
1921년 7월 휴전까지 사상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921년 1월에서 7월까지 6개월간에만 RIC, 영국군, IRA대원과 민간인을 포함해 1000여 명 이상이 죽었다. 이 수는 3년간의 전쟁기간 중 발생한 총 사상자 수의 약 70%에 이르는 수였다. 또한 4,500명의 IRA 대원들이 이 기간 동안 붙잡혀 억류당했다. (M.E. Collins, '''Ireland 1866-1966'' p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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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전 조약 ==
[[파일:Collinsfuneral.jpg|thumb섬네일|250px|1922년 8월, 콜린스의 장례식]]
{{본문|영국-아일랜드 조약}}
결국 긴 휴전 협정 끝에 [[1921년]] [[12월 6일]] [[영국]] [[런던]]에서 휴전 협약이 맺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