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인노첸시오 7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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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그리오라티가 1404년 10월 17일 만장일치로 선출되어 인노첸시오 7세라는 이름을 선택하였다. 그가 선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에서는 기벨린파가 폭동을 일으켰으나 나폴리 왕 라디슬라오가 군대를 이끌고 서둘러 로마에 와서 폭도들을 진압함으로써 진압되었다. 그 공로로 라디슬라오는 인노첸시오 7세로부터 많은 양보를 얻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자신의 경쟁자인 [[앙주의 루이 2세]]를 지지하고 있는 아비뇽의 대립 교황과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것이다. 인노첸시오 7세 역시 [[교황령]]에 대한 권리를 타협하자는 아비뇽 측의 주장에 전혀 응할 생각이 없었기에 그의 요청을 순순히 들어주었다.
 
인노첸시오 7세는 족벌주의에 따라 과거 밀라노의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 밑에서 [[콘도티에로]]로 일한 자신의 조카 루도비코 미그리오라티를 그의 능력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교황군 사령관으로 파격 승진시키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ref>Italian Biographical Dictionary, http://www.treccani.it/enciclopedia/lodovico-migliorati_(Dizionario-Biografico)/</ref><ref>Cipolletti, Carlo. "Migliorati, Ludovico." Studies on Fermo. http://ilfermano.blogspot.com/2014/01/ludovico-migliorati_11.html</ref> 뿐만 아니라 인노첸시오 7세는 그를 교황군 사령관으로 승진시킨 이후에는 1405년 4월에는 토디의 속죄회 총회장으로도 임명했다.<ref>Italian Biographical Dictionary, http://www.treccani.it/enciclopedia/lodovico-migliorati_(Dizionario-Biografico)/</ref> 루도비코 미그리오라티는 교황과 함께 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교황군 사령관으로서 로마의 게릴라 11명을 생포한 다음 자기 집으로 끌고가 모조리 참살했다. 그리고나서 그들의 주검을 산토 스피리토 병원 창문을 통해 길거리로 내던졌다. 이 사건으로 온 시내가 발칵 뒤집혔다. 교황과 추기경들, 루도비코를 따르는 이들은 서둘러 로마를 빠져나와 [[비테르보]]로 피신했다.
 
== 생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