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동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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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동맹이 된 이후의 모든 갱신과 마찬가지로 이 조약은 스코틀랜드보다 프랑스가 더 이득이였다. 프랑스는 가스코뉴에 대한 잉글랜드와의 투쟁을 계속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의 전면전에 대한 비용은 스코틀랜드가 부담해야만 했다.그럼에도 멀리 변방 지역이자 가난한 스코틀랜드는 이제 유럽의 주요 강국과 맞섰다. 실질적이기보다는 상징적이라 할지라도 동맹의 이점은 스코틀랜드와 크게 관련이 있다.<ref name="Cussans">Cussans, Thomas. "Kings and Queens of the British Isles". The Times Books, 2002, p.65.</ref>
 
그러나 단기간 동안에 이 조약은 스코틀랜드에 대한 독립을 뿌리봅기 위해 1296년에 스코틀랜드를 공격하여 엄청난 피해를 준 에드워드에 대한 보호를 해주지 못했다. 더욱이 1299년에 "지속적 평화와 우애" 조약에 따라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 적대 행위가 중단되면서, 에드워드는 그의 집중과 병력을 스코틀랜드에 모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에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의 올드 동맹보다는 [[로버트 1세]]의 군사적 감각 및 영감과 [[에드워드 2세]]의 실수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1326년 로버트는 [[코르베유 조약 (1326년)|코르베유 조약]]으로 올드 동맹을 갱신하였다. 이 동맹을 갱신하게 된 이유는 다른 어떤 것보다 예방 차원이였다: 양측의 국가는 당시 잉글랜드를 위험하게 보았다. 하지만 이 동맹은 1330년 [[에드워드 3세]]가 스코틀랜드 정복을 마치고 프랑스 지역에서 그의 영토 회복 준비를 하면서 급속히 바뀌었다. 프랑스-스코틀랜드 동맹은 처음으로 비상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1346년 에드워드는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괴멸시켰다. 두 달 뒤 스코틀랜드의 국왕 [[데이비드 2세]]는 [[네빌스크로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며, 잉글랜드 북부 침입을 실패했다. 에드워드의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의 11년간의 부재는 내부 문제와 스코틀랜드의 권력 분쟁을 증가시켰을 뿐이였다. 데이비드 2세는 그의 자유를 얻는 대가로 강화를 체결해야만 했다. 1357년 그가 석방됐음에도 스코틀란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관심을 막는데 남은 재위 기간을 썼다.<ref name="Cussans" />
 
동맹은 [[글래스고 주교]]와 [[제3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갤러웨이 경]]으로 이뤄진 대사단이 프랑스에 가면서 [[뱅센-에든버러 조약|재개]]되었다. 이번 동맹 조약은 6월 30일 [[뱅센 성]]에서 [[샤를 5세]]가, 10월 28일 [[로버트 2세]]가 [[에든버러 성]]에서 서명했다.<ref>Michel, vol i, pp71-72</ref>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