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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 정치 활동 ===
[[1959년]]에 [[연세대학교]] 법학 교수가 되었으며, 법철학, 영미법, 한국법제사 강의를 맡으면서 새로운 연구 영역을 개척하였다. 이후 [[양승두]] 교수와 한국인의 법 의식에 대한 연구, 한국 사회의 법에 대한 태도 연구를 진행했으며, 한국어 논문 뿐만 아니라 영어 논문을 다수 발표하였다. 법학자였지만 그는 한국 사회의 전통과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다. 교수 재직 중 [[연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소장에 임명되어 겸임하였다.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2년간 [[예일대학교]]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귀국하였다.
 
[[1970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외교안보 담당 특별 보좌관 및 잇달아 정치담당 특별 보좌관이 되었다. 1973년 12월 31일 하오, 한국 정부는 함병춘 대통령 정치담당 특별 보좌관을 [[주미 한국 대사]]로 임명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01040032920102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4-01-04&officeId=00032&pageNo=1&printNo=8698&publishType=00020| 제목 = 駐美大使에 咸秉春씨 임명 | 날짜 = 1974-1-4| 출판사 =경향신문 }}</ref> [[1974년]]에 주미 대사로 부임하였다.
[[1976년]] 한국인사가 미국 여야 정치인과 상원, 하원 의원을 상대로 [[대한민국]]에게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고자 만찬과 정치자금을 지원했다가 발각, [[코리아게이트 사건]]으로 비화되고, 주한미군 철수 여론이 [[미국]] 정계와 학계에 등장하자 그는 미국의 정치인과 지식인들을 설득, 주한미군 철수 여론의 확산을 막았다.
 
[[1977년]] [[6월]] 임기를 마치고 귀국, [[외무부]] 본부대사로 전임되었다가 1979년 [[1월 12일]] 대통령외교담당 특별보좌관에 임명되었다.
 
=== 생애 후반 ===
[[10·26 사태]] 이후 다시 연세대학교 법학 교수로 복직하여 법철학, 동양법제사, 법인류학 등을 강의하였으며 [[12월 17일]] 다시 [[최규하]]대통령에 의해 대통령 외교안보특보로 기용되었다. 1980년 8월 2일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에 위촉되었다. [[1981년]] [[8월]] 다시 연세대학교 법학 교수로 출강했다가 다시 [[1982년]] [[6월]]에 [[전두환]]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자신이 정치 전문가가 아니라 외교분야에서 활동한 것을 들어 거절했고 [[이순자]]가 공식 석상에서 활동하는 것을 전두환의 면전에서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이학봉]] 비서관을 보내 함병춘을 설득했다.
 
[[1983년]] [[6월]]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고 그해 [[10월]] 전두환 대통령의 동남아시아 5개국 순방길에 동행했다가 [[10월 9일]] [[미얀마|버마]]에서 일어난 [[아웅산묘역 폭탄테러사건]]으로 순직하였다. [[전두환]] 대통령을 태운 차량이 도착하기 전, 80여명의 각료, 기자단과 함께 예행연습을 하던 중, 음악 소리를 들은 [[북한 인민군]] 공작원들이 버튼을 눌러 80여 명의 수행원, 기자들과 함께 사망했다.
** 아들 : [[함재봉]](咸在鳳, [[1958년]] [[9월 5일]] ~ ),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겸 원장
** 아들 : 함재학(咸在鶴, [[1963년]] ~ ), [[연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 평가 ==
외교부 안에서도 [[영어]]로 미국인, 영국인을 설득할 수 있었던 인물이라는 평가와 충분하지 못한 행정경험으로 다소 빛이 덜 났다는 평도 있다.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