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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의 세력확장===
891년에 죽주(竹州)의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었다가 멸시를 받자 빠져나와 892년에 북원(北原)의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었다. 궁예는 양길의 신임을 받어 군사를 거느리고 주천(酒泉:지금의 예천)·내성(奈城:지금의 영월)·어진(지금의 울진) 등을 공략하여 항복 받았다. 894년 10월에 명주(溟州;江陵)를 점령하면서 강릉지역까지 수중에 넣었다. 그는 여세를 몰아 화천, 철원 등 강원도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궁예의 세력이 이처럼 급성장하자 패서지역(예성강 이북 지역) 족들이호족들이 차례로 궁예에게 자진 투항하였다. 이렇게 되자 궁예는 더 이상 양길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드디어 양길과 결별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이때 부터 사실상의 후고구려의 건국이다. 896년에는 7월 임진강을 따라 북상하여 당시 송악(松嶽; 지금의 開城)의 호족이었던 왕륭(왕건의 아버지)의 투항을 받았다. 예는 왕륭의 아들 왕건을 철원군 태수로 임명하였다. 그는 왕륭과 왕건 부자의 도움을 얻어 손쉽게 경기북부지역과 서해안 일대를 손아귀에 넣었다. 그리고 경기지역 호족들의 경제적 지원에 힘입어 충주지역 일대까지 무력으로 병합하였다. 898년 송악을 후고구려의 사실상 수도로 삼고, 왕건으로 하여금 양주와 청주(淸州;溫陽) 등 30여 성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899년 청주 지방을 점령하여, 소백산맥 이북의 한 강 유역 전역을 수중에 넣었다. 궁예는 이 과정에서 공이 많은 왕건에게 신라의 최고관직인 아찬 벼슬을 주었다. 또 이때 7월에 북원(北原)의 도적 우두머리 양길(梁吉)이, 궁예가 세력이 급성장 하는 것이 꺼리어 국원(國原) 등 10여 곳의 성주들과 함께 그를 칠 것을 모의하고 군사를 비뇌성(非惱城) 아래로 진군시켰으나 양길의 군사가 패하여 흩어져 달아났다. 궁예는 양길의 모든 세력들을 흡수하여 더욱 강성해졌다.
어쨌든 궁예는 그렇게 축출되었고, 궁예의 뒤를 이어 북방의 왕조로 추대된 것은 [[왕건]](王建)이었다. 왕건은 즉위와 함께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송악에 천도하니, 이것이 뒷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건국이었다.
 
태조 왕건은 일시 후백제와 휴전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낙동강의 서부 일대에서 쉴 새 없는 교전(交戰) 상태를 지속하였다. 이미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신라에서는 지방호족들이 독자적으로 고려나 후백제와 통하고 있었다. 중국과 통교를 하며 일종의 외교전(外交戰) 양상을 전개한 고려와 후백제는 공산(현재 대구)과 고창(현 안동)의 큰 두번의 전투를 치르게 된다. 공산은 왕건의 대패, 고창은 견훤의 대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 후로도 둘은 비슷한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으러나그러나 후백제는 내부 균열로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ref >{{서적 인용 |제목=[[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장=[[:s: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고려의 성립/고려의 통일#고려의 통일〔槪說〕|고려의 통일〔槪說〕]] |연도= 2004|출판사=도서출판 범한 |인용문=태조 왕건은 일시 후백제와 휴전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낙동강의 서부 일대에서 쉴 새 없는 교전(交戰) 상태를 지속하였다. 이미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신라에서는 지방호족들이 독자적으로 고려나 후백제와 통하고 있었다. 중국과 통교를 하며 일종의 외교전(外交戰) 양상을 전개한 고려와 후백제의 균형은 고창(古昌, 安東)에서의 전투를 계기로 고려측의 승리로 기울게 되었다. }}</ref>
 
===후삼국의 통일===
한편 후백제의 국내 정세는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 견훤이 그의 아들 신검(神劍) 등에게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전열(戰列)이 분열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명목만 유지하던 신라의 경순왕(敬順王)은 [[935년]]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무장(武將)이며, 동시에 정치가요, 외교가인 태조는 이로써 신라의 전통과 권위의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고, [[936년]] 견훤을 앞세워 후백제까지도 멸망시켰다.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통일 왕조를 세우는 데 성공한 태조는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여 북진정책을 통해 영토를 넓히고, 신라가 지니는 전통적인 권위를 원용(援用)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하는 등 신라의 지배층을 흡수·회유하였다. 또한 통일 후 호족들과 통혼(通婚)하여 의제가족적(擬制家族的)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들과 타협 또는 연합하였다.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러 호족들의 존재는 태조 왕건의 적지 않은 우려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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