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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후연 정권은 [[392년]]에 정령족의 [[적위 (오호십육국)|적위]](翟魏), [[394년]]에 [[서연 (오호십육국)|서연]](西燕)을 멸망시켰으며 [[동진]](東晉) 세력을 축출하고 산동반도 일대를 점령하였다. 한편 북방의 [[탁발부]]의 내전에 개입하여 [[탁발규]]가 북방을 통일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탁발규의 [[북위 (북조)|북위]](北魏)가 성장하자 위협을 느낀 모용수는 [[394년]]에 북위를 공격하였으나 참합피에서 대패하였으며, 이듬해 2차 정벌을 하였으나 도중에 병사하였다.
 
모용수의 뒤를 이은 [[모용보]](慕容寶)는 즉위하자마자 무리하게 개혁을 시도하다가 민심을 잃었으며 [[396년]] 8월에 북위의 침공을 받았다. 후연군은 북위의 침입에 거점에서 농성하며 맞섰으나 농성이 길어지자 모반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수도 중산을 유지할 수 없었던 모용보는 중산을 버리고 요서의 용성(龍城)으로 수도를 옮겼다. 버려진 중산에서는 [[모용상]](慕容詳), [[모용린]](慕容麟)이 차례로 황제를 자칭하기도 하였으나 곧 함락되었으며 업을 지키던 [[모용덕]](慕容德)은 중산 함락 직후인 [[398년]]에 황하 남쪽의 활대(滑臺)로 이동하여 [[남연]](南燕)을 건국하였다. 한편 용성의 모용보는 398년에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진격하던 도중 군대 내부에서 모반이 일어나 쫒겨났으며, 각지를 떠돌다가 끝내 반란군의 지도자 [[난한]](蘭汗)에게 살해되었다.
 
난한은 창려왕(昌黎王)을 자칭하며 후연을 다스렸으나 곧 모용보의 아들 [[모용성]](慕容盛)에게 살해되었고, 모용성이 후연의 군주가 되었다. 모용성은 종친과 공신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공포정치를 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모반 사건이 일어났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400년]]에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성(新城) 등 700여 리의 땅을 탈취하였다. [[401년]]에 모반으로 모용성이 죽고 모용수의 아들 [[모용희]](慕容熙)가 즉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