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동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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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6년 로버트는 [[코르베유 조약 (1326년)|코르베유 조약]]으로 올드 동맹을 갱신하였다. 이 동맹을 갱신하게 된 이유는 다른 어떤 것보다 예방 차원이였다: 양측의 국가는 당시 잉글랜드를 위험하게 보았다. 하지만 이 동맹은 1330년 [[에드워드 3세]]가 스코틀랜드 정복을 마치고 프랑스 지역에서 그의 영토 회복 준비를 하면서 급속히 바뀌었다. 프랑스-스코틀랜드 동맹은 처음으로 비상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1346년 에드워드는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괴멸시켰다. 두 달 뒤 스코틀랜드의 국왕 [[데이비드 2세]]는 [[네빌스크로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며, 잉글랜드 북부 침입을 실패했다. 에드워드의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의 11년간의 부재는 내부 문제와 스코틀랜드의 권력 분쟁을 증가시켰을 뿐이였다. 데이비드 2세는 그의 자유를 얻는 대가로 강화를 체결해야만 했다. 1357년 그가 석방됐음에도 스코틀란드에스코틀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관심을 막는데 남은 재위 기간을 썼다.<ref name="Cussans" />
 
동맹은 [[글래스고 주교]]와 [[제3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갤러웨이 경]]으로 이뤄진 대사단이 프랑스에 가면서 [[뱅센-에든버러 조약|재개]]되었다. 이번 동맹 조약은 6월 30일 [[뱅센 성]]에서 [[샤를 5세]]가, 10월 28일 [[로버트 2세]]가 [[에든버러 성]]에서 서명했다.<ref>Michel, vol i, pp71-72</ref> 친프랑스 정책의 로버트 2세의 즉위는 즉시적인 올드 동맹의 재개로 이어졌지만 [[스코틀랜드]]에 대한 이익은 엇갈렸다. 1385년에 잉글랜드에 대한 프랑스-스코틀랜드군의 침공 계획이 취소되었다. 이 계획에는 처음으로 스코틀랜드에 소규모 프랑스군을 보내는 것이 포함됐었다. 프랑스의 공격이 구체화되지 못하면서 이 계획은 어떠한 형태로도 이뤄지지 못 했다.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사이 악화된 관계는 프랑스의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가 "프랑스 왕이 잉글랜드와 2, 3년 강화를 하고 스코틀랜드로 진격하여 이들을 파괴하길 원했다고" 쓴 내용으로 보여준다.<ref name="test">McNamee, Colm . "The Wars of the Bruces: Scotland, England and Ireland". Tuckwell Press, 1996</ref>
 
공격적인 잉글랜드의 새로운 랭커스터 왕가의 왕들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두 왕국에게 있어서 동맹은 아직까지 필수적이였기에 15세기에도 동맹이 유지되었다. 1415년 [[헨리 5세]]의 군대에게 패배의 끝에 놓여있던 프랑스의 도팽 [[샤를 7세]]는 동맹인 스코틀랜드에 도움을 요청했다. 1419년과 1424년 사이에 많게는 15,000명 가량의 스코틀랜드군이 프랑스에 보내졌다.<ref>[https://archive.org/stream/scotspeeragefoun03pauluoft#page/166/mode/2up Balfour Paul. ''Scots Peerage'', vol iii, p. 167]</ref><ref>[https://archive.org/stream/scotspeeragefoun02pauluoft#page/264/mode/2up Balfour Paul.''Scots Peerage'', vol. ii p. 264]</ref>
 
프랑스와 스코틀랜드군은 1421년 [[보제 전투]]에서 잉글랜드에게 승리를 거뒀다. 이 전투는 [[백년 전쟁]]에 있어서 큰 터닝 포인트였고, 전투의 중요성은 매우 컸다. 이 승리는 잠시 뿐이였고: 1424년 [[베르누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은 패배하고 말았다. 이 패배에도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에게 잉글랜드의 우위로부터 효과적으로 방어를 해내고, 숨을 쉴 공간을 마련해주었다.<ref name="Cussans" />
 
게다가 1429년에 스코틀랜드군은 그 유명한 [[오를레앙 공성전|오를레앙 해방]] 당시에 [[잔 다르크]]를 도우러 오기도 했다. 또한 스코틀랜드 병사들은 프랑스의 국왕의 친위 부대 [[가르드 에코세즈]]에 복무하기도 했다. 프랑스로 향한 많은 스코틀랜드 군인들은 그곳에 정착하기로 택했다. 일부 장교들은 프랑스내 작위와 땅들을 부여받기도 했다. 15-16세기에 그들은 자연적으로 프랑스화가 되었다.<ref name="naturalisation">{{cite web| url=http://journals.cambridge.org/action/displayFulltext?type=1&fid=5218&jid=HIS&volumeId=40&issueId=04&aid=5217 |title=Cjo - Abstract - French Naturalization Of The Scots In The Fifteenth And Sixteenth Centuries |publisher= Journals.cambridge.org | date= | accessdate=2010-03-06}}</ref>
[[File:Francois Second Mary Stuart.jpg|thumb|left|[[메리 (스코틀랜드의 여왕)|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와 [[프랑수아 2세|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2세]]의 혼인으로 잠시 올드 동맹이 부활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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