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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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내용이랑 다른 자료들보니까 1904년에 죽은걸로 나와있던데 어디서 1905년에 죽었다하나요?
대한제국 관찬한 '박정양 시장'에서 분명히 '光武九年乙巳十一月十九日考終于第享年六十五'로 기록되고 '고종실록'도 그가 1905년 겨울까지 살아 있었는 사실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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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ark Jong Yang.jpg|thumb|박정양, 1888년]]
'''박정양'''(朴定陽, [[1842년]] [[2월 4일]]( [[음력 12월 24일|음력 1841년 12월 24일]]) ~ [[1904년1905년]] [[음력 11월 19일]]<ref>[http://yoksa.aks.ac.kr/dataFiles/img/book2/8/JE_A_80560/JE_A_80560_001_000011.gif 박정양시장 [朴定陽諡狀]]</ref>)은 [[조선]] 후기의 문신, 외교관, [[내각총리대신]], [[대한제국]]의 정치가이다. 구한말의 온건 개화파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였다. [[조선]]의 첫 주미국 대사이기도 했다.
 
[[1866년]](고종 3) 문과에 급제, 참판 등을 지내고, [[1881년]] [[조사 시찰단]]을 조직하여 일본의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와 관제 개정을 추진했다. 87년 미국특파 전권대사로 부임하여 외교활동을 하다가 [[청나라]]의 압력으로 귀국해야 했다. [[1894년]] 1차 김홍집 내각의 학부대신이 되고, 이듬해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자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과도내각을 조직했다. 그뒤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의 회의원이 되고 제2차 김홍집 내각의 학부대신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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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 ===
[[1904년]] 궁내부특진관과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를 거쳐 [[9월]] 표훈원 총재(表勳院總裁)에 임명되었으며 [[대한제국]] 정부에서 주는 태극훈장(太極勳章)을 수여받았다. 초조함과 긴장이 심해져 번열증(煩熱症)을 앓았으며 과로로 병이 심해져 [[1904년]] [[11월 14일]] 표훈원 총재직을 사퇴하였고, [[1905년]] [[을사늑약]] 당시에는 반대 상소를 올렸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4211027_007 고종실록 46권, 고종 42년 11월 27일 양력 7번째기사]</ref>. 그해 [[12월 15일]] (음력 11월 19일)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죽천고 (竹泉稿)》, 편저로는 《해상일기초 (海上日記草)》, 기행문으로는 《일본내무성급농상무성시찰서계 (日本內務省及農商務省視察書啓)》, 《일본내무성시찰기 (日本內務省視察記)》, 《일본농상무성시찰기 (日本農商務省視察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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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842년 태어남]]
[[분류:1904년1905년 죽음]]
[[분류:병사한 사람]]
[[분류:과거 급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