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마르 (조지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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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르 시대의 정치와 문화적 위업들은 그녀 이전의 조지아 역사에서는 선례가 없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업적들은 깊고 복합적인 과거의 역사와 선대가 그 뿌리를 이뤘다. 타마르가 성취한 업적들은 대부분 그녀의 증조부 다비트 4세(즉위. 1189~1125)의 개혁과 가장 직접적인 연관이 있고, 좀 더 간접적으로는 11세기의 처음 10년 동안에 조지아의 여러 왕국들과 공국들의 정치적인 통합을 계획하고 실행했던 [[타오의 다비트 3세|다비트 3세]]와 [[조지아의 바그라트 3세|바그라트 3세]]의 단합된 노력이 기반이 되었다.<ref>Rapp (2003), p. 413.</ref> [[중세 시대]], 그녀의 통치 기간에서 마지막 해 쯤에, 조지아 왕국의 국력과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타마르의 왕국 영역은 북부와 중앙 아르메니아에서의 충성스러운 자차리아드 관리 체제와 봉신인 시르반과 동맹인 트레비존드를 형성하므로, 북쪽의 [[볼쇼이캅카스 산맥|대캅카스]] 산마루에서 부터 남쪽의 [[에르주룸]]까지 그리고 북서쪽의 [[지기 (조지아)|지기]]에서 동남쪽의 [[간자]]까지 확장되었 판-팝카스 제국을 이뤘다. 동시대의 조지아 역사가는 타마르를 "폰투스의 바다(흑해)에서 부터 [[고르간]]의 바다([[카스피해]])까지, [[스페르 (조지아)|스페리]]부터 [[데르벤트|데르벤드]]까지 그리고 [[하자르족|카자리아]]와 [[스키타이|스키타이아]]의 이쪽에서 저쪽까지"의 모든 영토의 주인이라며 격찬했다.<ref>{{언어링크|ka}} Shengelia, N., [http://www.nplg.gov.ge/ic/DGL/work/SIN/sin%203+/nawili%201/5/2.htm#_ftnref75 საქართველოს საგარეო პოლიტიკური ურთიერთობანი თამარის მეფობაში] ("Foreign Relations of Georgia during the reign of Tamar"), in Melikishvili (1979).</ref><ref>Salia (1983), pp. 177–190.</ref>
국왕의 칭호는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그 칭호는 조지아 왕국 영역의 전통적인 구획들을
[[파일:GEORGIA, Kingdom. T’amar. Queen Regnant, 1184-1213. Æ Fals (26mm, 6.65 g, 3h). Dated Year 420 of the Paschal cycle (AD 1200).jpg|thumb|타마르의 [[모노그램]]이 특징인 조지아어와 아랍어가 새겨진 구리 동전 (1200년)]]
그 여왕은 단 한번도 독재 권력을 휘두른 적이 없으며 귀족 의회는 계속 기능했다. 그러나 타마르 자신의 명성은 그리고 조지아의 [[봉건 제도]] 번역서인 ''파트론크모바''의 확장본에서는 그녀는 해체된 왕국에서 온 더 강력한 왕조의 왕자들을 유지시켰다고 한다. 그때는 조지아 봉건주의 역사에서 고전시대였다.<ref>Suny (1994), p. 43.</ref> 그들에게 이전에 대부분 알려지지 않은 지역들에의 봉건제도 시행 이식 시도는 반대없인 통과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1212년에 조지아의 북동 국경의 [[프코비]]와 [[체즈족|디도]]의 산악 지방 사람들 사이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바네 므크하르그르드젤리가 이끄는 군대와의 3달 간의 격렬한 전투 후에 진압되었다.<ref>[[:en:Kevin Tuite|Tuite, Kevin]] (2003), "Political and social significance of highland shrines in post-Soviet Georgia." ''Amirani'' '''9''': pp. 7–23.</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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