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갈리스토 3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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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니콜라오 5세]]의 선종 후 개최된 [[콘클라베]]에서 [[콜론나 가문]]과 [[오르시니 가문]] 어느 쪽에서도 교황을 배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두 세력 간의 타협으로 중립적인 인물이었던 알폰소 보르자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1455년 매우 이른 나이에 베드로좌에 착좌한 그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유약하고 무능한 교황으로 취급당한다. 1456년 갈리스토 3세는 교황 칙서 《Inter Caetera》를 반포하였다(1493년 반포된 Inter Caetera와는 다르다). 이 칙서는 포르투갈 정부에 이교도를 물리칠 권한과 《Romanus Pontifex》와 《Dum Diversas)》 등 이전의 칙서들에서 확인된 [[무어인]]들의 노예 신분을 재차 확인해 준 동시에 아프리카인들을 노예화시키는 것에 대한 교황의 승인을 담고 있었다. 《Romanus Pontifex》는 또한 포르투갈 왕국의 [[항해왕자 엔히크]] 휘하에 [[그리스도 기사단]]을 두는 것을 승인해 주었다.<ref>''European treaties bearing on the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nd its Dependencies to 1648'', ed. Frances Gardiner Davenport, (Carnegie Institute of Washington, 1917), 27.</ref>
 
그런데 1456년 갈리스토 3세가 반포된 칙서 《Inter Caetera》는 1435년 그의 전임자인 에우제니오 4세가 반포한 칙서 《오래 전에》(Sicut Dudum》에)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내용이었다. 왜냐하면 에우제니오 4세는 《오래 전에》(Sicut Dudum)에서 이교도들(흑인 노예들을 가리킴)도 하느님의 모상을 본따 창조된 인간이기 때문에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그 어떤 기독교 신자도 이들의 자유를 함부로 박탈할 권한이 없다고 천명하였기 때문이다.
 
갈리스토 3세는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한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기 위한 [[십자군]] 모집을 호소하였지만, 여러 유럽 기독교 군주들의 지원을 얻지는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