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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방 이민족과의 혈투 ===
[[효렴]]에 천거되어 요동속국(遼東屬國)의 [[장사 (관직)|장사]]에 임명됐다. 시험 삼아 수십 기(騎)를 이끌고 성채 바깥으로 나가봤다가 느닷없이 [[선비족]] 수백 기와 마주쳤다. 일단 비어있던 정(亭)으로정자로 물러나 ‘지금 부딪치지 않으면 싹 다 죽을 뿐이다’며 일동을 다잡은 후에 양 끝에 날이 달린 [[모 (무기)|모]]인 양인모(兩刃矛)를 쥐고 돌진하여 수십 명을 살상하였다. 공손찬도 따르던 [[기병]]의 절반을 잃었지만 위기를 면하였다. 이후 탁[[현령]](涿―)으로 전임되었다.
 
[[중평]] 연간에<ref>《삼국지》 공손찬전의 [[광화 (후한)|광화]]는 오기이다.</ref> 일어난 [[양주의 난]]으로 인해 [[유주 (중국)|유주]]에서도 오환돌기(烏桓突騎) 3,000명을 모아 지원하게 되었으며 그 도독은 공손찬이 맡았다. 그러나 군량 지급이 자꾸 미뤄지자 [[오환족]]들은 본국으로 돌아가버렸다.<ref name='우유'>《후한서》73권 열전 제63 유우</ref> 당초 오환돌기의 통솔을 청했지만 공손찬에게 밀려 불만을 품었던<ref>원굉(袁宏), 《[[후한기]]》25권</ref> [[어양군]] 사람 [[장순 (후한)|장순]]은 이 기회를 빌어 장거(張擧), 오환족들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이 [[년|해]]가 [[187년]](중평 4년)이었다.<ref name='헌제 아빠'>《후한서》8권 본기 제8 [[효영제]] 유굉</ref> 공손찬이 이들과 싸워 [[기도위]]로 승진하기도 했으나 그 형세가 워낙 왕성하여 요서오환 [[구력거]] 등에 의해 [[청주 (중국)|청주]], [[서주 (중국)|서주]], 유주, [[기주]]까지 피해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