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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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396년 모용수가 사망할 당시 모용회를 다음 대의 황태자로 지목했으나, 모용보는 모용회를 꺼려해 장남인 [[모용성]](慕容盛)과 삼남인 [[모용책]](慕容策) 중 황태자를 세우려 했다. 모용성 또한 모용회를 견제해 모용책에게 황태자를 양보했으며, 결국 모용책이 황태자가 되자 모용회는 분노하였다.
 
그 뒤 397년 모용보가 [[연경|계]](薊)에서 [[북위 (북조)|북위]](北魏)에 패배한 뒤 [[모용상]](慕容詳)이 중산(中山)에서 스스로 후연의 황제를 자칭하자 모용보는 황룡(黃龍)으로 피신했으며, 용성(龍城)에 주둔하던 모용회는 군사를 이끌고 북위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하지만 모용회는 점차 거만하게 행동했으며 이에 [[모용농]](慕容農)과 [[모용륭]](慕容隆)으로부터 훈계를 들었고, 모용보는 모용회의 군사를 거두어 모용륭과모용농과 모용농에게모용륭에게 배속시켰다. 이에 모용회는 격노하여 모용륭과모용농과 모용농을모용륭을 암살하고자 자객을 보냈으며, 모용륭은 살해되었으나 모용농은 자객인 구니귀(仇尼歸)를 포획한 뒤 모용보에게로 도망쳤다.
 
이후 모용회는 모용농과 모용륭이 반역을 꾀했다는 거짓 보고를 하였으나, 모용농으로부터 사정을 파악한 모용보는 모용회를 불러들인 뒤 바로 살해하려 하였다. 하지만 모용회는 도주한 뒤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용성에 머물던 모용보를 포위했으며, 녹상서사(錄尙書事) 및 황태자를 자칭하며 모용보에게 사자를 보내어 모용농과 모용성을 사형시키고 자신을 태자로 책봉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