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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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수'''(慕容 垂, [[326년]] ~ [[396년]], <small>재위:</small> [[384년]] ~ [[396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연]](後燕)의 제1대(초대) 황제. 자는 도명(道明),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성무제(成武帝)이다.
 
== 즉위 이전생애 ==
=== 즉위 이전 ===
[[전연]](前燕) [[모용황]](慕容皝)의 다섯째 아들로 모친은 단씨(段氏)이며 원래 이름은 모용패(慕容覇)이다. [[326년]]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모용황의 총애를 받았다. 모용황은 모용패를 [[태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그만두었다. 그러나 태자 [[모용준]](慕容俊)보다 모용패를 더 총애하였고, 이로 인해 모용준은 모용패를 시기하였다. 모용준이 즉위한 이후 모용패는 견제를 받아 지방으로 좌천되기도 하고 많은 제한을 받았다. 모용패는 낙마하여 앞니가 부러지게 되자 이를 핑계로 이름을 [[모용패|수]](垂)로 바꾸기도 하였다. 모용수의 부인은 단씨(段氏)였는데, [[모용준]]의 황후인 가족혼씨(可足渾氏)와 불화가 있어 누명을 쓰고 죽었다. 황후는 동생을 모용수의 부인으로 삼았으나 사이가 좋지 않아 모용수를 더욱 미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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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에는 부견의 아들 [[부비 (전진)|부비]](苻丕)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용수는 모반을 계획하였다. 이때 [[정령]](丁零)족 적빈(翟斌)이 낙양 근방에서 모반을 일으켰고, 모용수는 토벌을 명받아 업에서 출진하였다. 모용수는 감시역으로 파견된 부비룡(苻飛龍)을 살해하고 [[군대]]를 모으는 한편 적빈의 군대까지 흡수하여 강력한 세력을 키웠다.
 
=== 치세 ===
[[384년]] 1월 모용수는 연왕(燕王)에 즉위하여 [[후연]]을 건국하였다. 이후 전진의 [[부비]]가 지키는 업을 포위하고 [[1년]] 동안 전쟁을 벌였는데, [[부비]]의 수비가 견고하여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385년]] 8월에 [[부비]]가 업에서 빠져나가자 업을 점령하였고 황하 이북 일대를 대부분 점령하였다. [[386년]] 1월에는 황제에 즉위, 수도를 [[중산]](中山;지금의 [[하북성]] [[정주]])에 정하고 내정을 정비하였다. [[392년]]에는 [[정령]]족 적교(翟釗)의 [[적위 (오호십육국)|적위]](翟魏)를 멸망시켰고, [[394년]]에는 [[서연 (오호십육국)|서연]](西燕)을 멸망시켜 화북 일대를 평정하였다. [[동진]]과는 주로 산동 지방에서 충돌하였는데, [[394년]] 이후 동진을 축출하고 산동반도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한편 [[탁발부]]의 내전에 개입한 모용수는 [[탁발규]]를 지원하여 [[탁발규]]가 북방을 [[통일]]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탁발규]]의 [[북위 (북조)|북위]]가 성장하자 위협을 느낀 모용수는 [[395년]]에 [[태자]] [[모용보]](慕容寶)를 보내 [[북위]]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참합피(參合陂)에서 [[탁발규]]에게 대패하여 군대가 학살되었고, 이에 모용수는 [[396년]]에 직접 대군을 이끌고 다시 [[북위]]를 정벌하였다. [[평성]](平城)을 점령하고 [[북위]]에 큰 타격을 입히는데 성공한 모용수는 전해에 참합피에서 학살당한 군대의 해골을 보고 충격을 받아 병을 얻었다. 이로 인해 [[북위]] 정벌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돌아오던 도중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 가계가족 ==
=== 아내 ===
==== 정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