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 안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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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시조 =
| 집성촌 =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정읍시)|입암면]]<br />[[전라북도]] [[김제시]] [[용지면]] 구암리<br>[[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 인물 = [[안우]], [[안지 (1377년조선)|안지]], [[안극가안의]], [[안기종]], [[안의]], [[안몽상]], [[안효제]], [[안희제]], [[안준상]], [[안호상]], [[안덕기]], [[안건일]], [[안영화]], [[안경수 (1949년)|안경수]], [[안민석]]
| 년도 = 2015
| 인구 = 26,09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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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우]]'''(安祐, ? ~ [[1362년]]) : 1352년(공민왕 1) 군부판서(軍簿判書)로서 조일신의 난을 평정하였고, 전리판서(典理判書)·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거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임명되었다. 1357년 참지중서정사(參知中書政事)로서 안주군민만호부만호(安州軍民萬戶府萬戶)를 겸임하였다. 이듬해 기철(奇轍)을 주살한 공으로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 홍건적이 침입하자 서북면부원수(西北面副元帥)로서 적을 대파하였다. 1359년 홍건적의 잔여 무리를 쫓아 고선주(古宣州)에 이르러 수백 명의 목을 베고 돌아와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추충절의정란공신(推忠節義定亂功臣)이 되었다. 이어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상원수(上元帥)가 되었고 재차 침입해 온 홍건적을 박주(博州)·영변(寧邊) 등지에서 대파하고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 [[안지 (조선)|안지]](安止, 1384년 ∼ 1464년) : 1414년(태종 14)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박사가 되고, 1416년 다시 문과중시에 을과 2등으로 급제하여, 예문관의 수찬(修撰)·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445년(세종 27) 공조참판으로 권제(權?)·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 바쳤고, 이듬해 호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집현전부제학·이조참판을 거쳐 공조판서에 올랐으나 사필(史筆)의 일로 고신(告身)을 환수당하였다. 1455년(세조 1)에 소환되어 지중추원사에 복관이 되고, 이어 영중추부사에 올랐다.
* [[안의]](安義, 1529년 ~ 1596년) : 자는 의숙(宜叔), 호는 물재(勿齋). 전라도 태인 출신. 병조판서 안사종(士宗)의 후손이며, 이항(李恒)의 문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손홍록(孫弘祿)과 함께 의곡계운장(義穀繼運將)이 되어 곡식과 포목을 행재소(行在所)로 수송하였다. 그 해 7월 왜장 고바야카와(小早川降景)가 전주를 공격하자 전주경기전참봉(全州慶基殿參奉) 오희길(吳希吉)·손홍록과 함께 경기전을 지켰고, 태조의 수용(睟容)과 제기(祭器), 사고(史庫)의 역대실록과 전적을 정읍의 내장산(內藏山)용굴암(龍窟庵)에 옮겨 보존하였다. 1593년 행재소에 나아가 중흥의 6책(策)을 아뢰고 별제(別提)를 제수받았다. 전라도 태인의 남천사(藍川祠)에 제향되었다.
* [[안기종]](安起宗, 1556년 ~ 1633년)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병을 이끌고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의 휘하로 들어가서 유곡(柳谷)·영천·화왕산성(火旺山城) 등지에서 적을 무찔러 많은 전공을 세웠다.
* [[안의]](安義) : 자는 의숙(宜叔), 호는 물재(勿齋). 전라도 태인 출신. 병조판서 안사종(士宗)의 후손이며, 이항(李恒)의 문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손홍록(孫弘祿)과 함께 의곡계운장(義穀繼運將)이 되어 곡식과 포목을 행재소(行在所)로 수송하였다. 그 해 7월 왜장 고바야카와(小早川降景)가 전주를 공격하자 전주경기전참봉(全州慶基殿參奉) 오희길(吳希吉)·손홍록과 함께 경기전을 지켰고, 태조의 수용(睟容)과 제기(祭器), 사고(史庫)의 역대실록과 전적을 정읍의 내장산(內藏山)용굴암(龍窟庵)에 옮겨 보존하였다. 1593년 행재소에 나아가 중흥의 6책(策)을 아뢰고 별제(別提)를 제수받았다. 전라도 태인의 남천사(藍川祠)에 제향되었다.
* [[안몽상]](安夢祥, ? ~ 1637년) :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첨정(訓練僉正)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삼학사와 더불어 강화군영에 파총(把摠)으로 있었을 때 갑곶진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조정에서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하였다가 다시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증봉하였다.
* [[안효제]](安孝濟, 1850년 ~ 1912년) : 안기종(安起宗)의 후손. 1883년(고종 20)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884년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으나, 의복제도를 변경하는 영(令)이 내려지자, 이의 부당함을 상소한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1887년 성균관전적으로 다시 등용되어 지평을 거쳐, 1889년 정언이 되었다. 그때 관황녀(關皇女)가 고종의 총애를 받아 진령군(眞靈君)에 봉해지는 한편, 위복(威福)을 전단(專斷)하자, 그녀를 벨 것을 상소하여 고종의 분노를 사서 추자도에 귀양을 갔다. 1894년 임자도(荏子島)로 옮겨진 뒤 곧 귀양이 풀리고 홍문관수찬지제교 겸 경연검토관(弘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ㆍ춘추관기사관의 관직이 내려졌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같은 해 9월 흥해군수로 나가서 선정을 베풀어 치적을 올렸다. 1895년 복제가 개정되어 검은 옷을 입으라는 영이 내려지자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해 8월에 민비가 시해되고 왕후폐위조칙(王后廢位詔勅)이 내려지자 민비의 복위를 건의하였고, 단발령을 적극 반대하였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 강제로 병탄당하자 산중에 들어갔고, 그해 11월 일제가 이른바 은사금(銀賜金)을 지급하려 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여 창녕경찰서에 갇히기도 하였다. 그뒤에도 일제에 항거하고 또 투옥되었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