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투안 라부아지에: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TTT.. (토론 | 기여)
TripleT.bot (토론 | 기여)
잔글 Robot: Automated text replacement (-재정총감 +재무장관)
30번째 줄:
[[1768년]] 라부아지에는 세금징수조합의 일원이 되었고, 담배 생산과 판매를 관장하는 담배 위원회의 지역 감찰관이 되었다. 그의 상관은 세금징수원, 변호사, 그리고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감독이기도 한 자크 폴즈였다.<ref>Poirier, J. P., op. cit., pp. 23~24.</ref> 라부아지에는 주로 소매상인들 간의 밀수와 사기를 적발하는 역할을 받았다. 당시 담배는 많은 양이 은밀한 거래를 통해서 밀수되곤 하였으며, 소매상인들은 그들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밀수한 담배를 농장에서 생산된 담배와 섞은 후 재와 물을 첨가하였다. 라부아지에는 그의 지식과 기술을 이용하여 소매상인들이 판매하는 담배의 질을 분석하여 이러한 사기 행위를 적발하곤 하였다.<ref>Ibid., p. 25.</ref> 라부아지에는 당시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부유해졌으며, [[1771년]] [[12월 4일]] 자크 폴즈의 외동 딸인 [[마리 앤 피에레테 폴즈]]와 결혼하였다. 이후 마리는 이후 실험기구 묘사, 결과 기록, [[영어]] 논문 번역 등을 하면서 라부아지에를 도왔다. [[1772년]]에 라부아지에의 아버지인 장 앙투안은 라부아지에에게 귀족의 칭호를 매수해주었다. 이는 당시 부유한 부르주아들의 관습이었다.<ref name="2007britannica"/>
 
[[1774년]] [[8월 24일]]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가 [[루이 16세]]에 의해서 [[프랑스]]의 재정총감으로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ref>Ibid., p. 85.</ref> 그는 많은 부분에서 개혁을 시도하였고, 라부아지에가 속해있던 세금징수조합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튀르고는 쓸모없는 세금을 폐지시키려고 하였으나,<ref>Ibid., p. 87.</ref> 이러한 움직임은 세금징수원들에게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걱정은 튀르고의 자유주의정책으로 교역과 소비가 크게 늘어나 거둘 세금도 많아졌기 때문에 사라졌다. 이 와중에도 라부아지에의 영향은 점점 커져 세금징수조합의 관리직을 맡기도 하였으며, 소금, 담배, 알코올성 음료 등 [[파리 시|파리]]에 드나드는 물건의 세금을 관리하는 위원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ref>Ibid., p. 88.</ref>
 
==활동기 (1775~1789)==
67번째 줄:
====튀르고와 네케르====
[[그림:Jacques Necker.jpg|thumb|right|180px|자크 네케르]]
세금징수원으로써의 능력과 과학적, 기술적 능력을 인정받아 [[1775년]] [[3월 30일]] 재정총감재무장관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는 라부아지에를 화약국장으로 임명하였다.<ref>Ibid., p. 92.</ref> 그는 일꾼들을 대상으로 [[초석]]과 [[화약]]에 대한 [[화학]]과 [[수학]] 지식 등을 가르치는 교육과정을 개설하였고, 화약 제조 과정을 크게 개선하였으며, [[인도]]로 기술자를 보내어 초석이 많이 산출되는 이유에 대한 책을 저술하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76년]] 4월 [[바스티유 감옥]] 근처의 병기창으로 그의 집과 연구실을 옮겼다. 그의 집에는 큰 도서관과 거대한 실험실을 갖추고 있었으며, 화학자뿐만이 아닌 당대의 수많은 과학자들이 그의 집로 몰려들었다. 라부아지에의 아내인 [[마리 앤 피에레테 폴즈|마리 앤 라부아지에]]는 이곳에서 남편의 실험을 종종 돕기도 하였다. 그녀는 화학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고 [[영어]]를 배웠기 때문에 라부아지에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ref>Ibid., pp. 94~96.</ref>
 
[[1776년]] [[5월 12일]] [[루이 16세]]에 의해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튀르고]]가 퇴임하고<ref>Ibid., p. 100.</ref> [[자크 네케르]]가 재정총감이재무장관이 된 이후에도 라부아지에는 화약국장자리를 유지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78년]] 화약의 원료가 되는 [[초석]] 산지를 찾기 위해 [[프랑스]]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였고 조직 체계을 좀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고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프랑스의 화약제조는 크게 개선될 수 있었다. 또한 라부아지에는 [[초석]]을 화학적으로 합성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많은 연구를 하였고, 그 결과 [[질산]]을 제조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아내었으나 초석 합성에는 실패하였다.,<ref>Ibid., pp. 117~119.</ref> [[1778년]] 라부아지에는 [[발루아]] 근처의 사유지를 구입하였다. 그는 그의 사유지에서 과학적 접근법을 통한 새로운 농경법을 시도하였고, 이는 농작물의 생산을 크게 증대시킬 수 있었다.<ref>Ibid., pp. 121~122.</ref> 이 기간 동안 라부아지에의 재정 관리능력은 크게 발전하였다.<ref>Ibid., p. 127.</ref> 또한 라부아지에는 공중보건에 관심을 가져 [[센 강]]의 수질에 대한 연구나 음식의 보존에 대한 연구도 진행하였다. 네케르는 종종 대중들의 의견에 관심을 보였는데, 이러한 행위는 왕의 위엄에 해를 끼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루이 16세]]는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1781년]] [[5월 19일]] 네케르를 해임시켰다.<ref>Ibid., p. 134.</ref>
 
====고위공직자 생활====
[[1784년]] 라부아지에는 [[독일]]의 의사인 [[프랑츠 안톤 메스머]]의 치료 요법을 검증하는데 일조하였다. 메스머는 자력을 이용하여 사람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라부아지에는 [[벤저민 프랭클린]] 등 여러 과학자와 함께 메스머의 치료 요법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1785년]]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이사가 되었고, 이는 그의 공직 생활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때부터 그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ref>Ibid., pp. 154~159.</ref> 그는 아카데미를 좀 더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아카데미의 조직을 개편하였다.<ref>Ibid., pp. 160~161.</ref> [[1787년]]에는 [[1778년]]에 라부아지에가 담배와 술 등의 밀수를 막기 위해서 제안한, [[파리 시|파리]]를 벽으로 둘러싸는 방안이 실행되었다. 이로 인해서 라부아지에는 대중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ref>Ibid., pp. 171~172.</ref>
 
[[1785년]] [[6월 7일]] 라부아지에는 [[자크 네케르|네케르]]의 후임인 [[샤를 알렉산드로 드 칼론]]의 요청으로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는 방법을 담은 책인 ''Gazette de France''를 출판하였다. 칼론은 이에 만족하였고, 라부아지에를 신설된 농업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농업위원회의 위원이 된 후 그는 농업에 관련된 책을 저술하기도 하고, 농업의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변화를 시도하였다.<ref>Ibid., pp. 199~200.</ref> 그는 [[루타바가]] 경작을 장려하기 위해서 농부들에게 씨를 분배해주고 경작 방법을 가르쳤으며, 농부들에게 낮은 이자로 돈을 융자해줄 은행의 설립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농업위원회는 파리 농업학회와 주도권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각 지역의 농업학회는 농업위원회의 방침이나 조사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결국 [[1787년]] 위원회장이 교체되고 [[4월 9일]]에는 칼론이 재정총감에서재무장관에서 물러나자 라부아지에는 근대적인 농경법을 도입하고자 했던 그의 계획을 포기해야했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농경법을 실험할 시험 농장을 설립하기도 하였다.<ref>Ibid., pp. 201~205.</ref>
 
[[1787년]] 라부아지에는 오를레앙 주의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파리 시|파리]]와 [[오를레앙]]을 오가며 여러 활동을 하였다. 그는 주의회의 하위 기관인 공공 복지 및 농업 위원회에 활발히 활동하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벵티엠]]({{llang|fr|vingtième}})이라는 이름의 세금을 거두고 있었는데, 이 세금에 대해서는 귀족들은 해당사항이 없었다. 라부아지에는 벵티엠을 귀족들도 과세대상이 되는, 새로운 토지세로 변경하는 작업에 참여하였다. 또한 그는 부역을 하위 계층을 대상으로 부과되는 세금인 [[타유]]({{llang|fr|taille}})의 일부로 변경시키는 것에 대해서, 이 역시도 모든 사람에 대해서 과세대상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귀족계급의 반발에 부딪혀 이를 이루지는 못하였다.<ref>Ibid., pp. 207~208.</ref> 라부아지에는 복지 사안에 관심을 가져 과부 등의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한 기금 조성을 계획하기도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ref>Ibid., p. 209.</ref> 그는 정체되어있던 프랑스의 농경 상황 개선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이 외에도 산업 발전 등 많은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ref>Ibid., pp. 210~213.</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