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니콜라오 5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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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오 5세의 아낌 없는 후원 아래 [[인문주의]]도 빠르게 성장했다. 그동안 로마에서 인문주의 학문은 이방 종교에 대한 불건전한 관심으로 지적받아 왔으며, 심지어 교회를 분열시키는 이단을 만들어내는 원인으로 지목받아 왔다. 그러나 니콜라오 5세는 인문주의를 그리스도교 도시인 로마의 문화 수준을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한 수단으로 봤다. 그래서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후 그리스 학자들을 데려오기 위해 동방에 특사를 보냈다.{{sfnp|Duffy|1997|p=181}} 또한 교황은 [[로렌초 발라]]로 하여금 그리스도교도와 이교도를 구분하지 않고 그리스 역사책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도록 했다.{{sfnp|Sider|2005|p=147}} 이는 인쇄술이 도입되기 전에 지식의 범위를 급속도로 넓히는데 크게 기여했다.
 
니콜라오 5세는 아스콜리의 에녹과 조반니 토르텔리의 도움을 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제국]]으로부터 필사본을 포함해 9만 권의 서적을 구출해 이들을 소장할 도서관을 설립했다. 교황 본인은 그의 친구인 에네아 실비로 피콜로미니(훗날의 [[교황 비오 2세]])도 “그는 인간의 지식 범위 밖에 있는 것 외에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해박학 지식을 갖고 있었다. 또한 니콜라오 5세는 [[바티칸 도서관]]을 설립하고 학자들이 이곳에 와서 연구하는 것을 지원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452년 늦은 봄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의 침략이 임박하자 도움을 요청하는 친서를 니콜라오 5세에게 보냈다.
 
1455년 3월 24일 니콜라오 5세는 [[통풍]]으로 선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