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드 에코세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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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 그랑드 아르메 에코세즈 ===
1418년 [[올버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는 그의 아들이자 [[스코틀랜드의 시종관]] [[제2대 버컨 백작 존 스튜어트]]를 중세 시대 스코틀랜드가 해외로 파견한 최대 병력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 7000-8000명의 병력이 1419년 10월 [[라로셸]]에 도착했고 도팽과 [[투르]]에서 만나기 위해 서둘렀다. 장차 [[샤를 7세]]인 도팽이 처음으로 행한 것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환대한것이였다. 버컨 백작은 [[샤티용쉬르앵드르]]를, [[제5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위그턴 백작]]은 [[뒹르루아]]를, [[단리의 존 스튜어트]] 경은 [[콩크레소]]와 [[오비니쉬르네르|오비니]]를, 토머스 세턴 (Thomas Seton)은 [[랑제]]성을 수여받았다. 스코틀랜드군 지휘관들은 추가적인 병력 모집을 위해 스코틀랜드에 돌아가기로 하였다. 스코틀랜드 지휘관들은 4000-5000명의 지원 병력과 함께 1420년에 돌아왔다. 한편 도팽과 있던 다른 지휘관들은 스코틀랜드 파견 병력 중이 대략 용감한 100명 정도를 그의 호위병으로 삼는것을 동의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프랑스와 함께 대승을 거둔 1421년 [[보제 전투]]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였으며, 이 전투에서 [[클레런스 백작]]이 버컨 백작의 메이스에 맞아 떨어졌다고 전해진다. 스코틀랜드인들은 6,000명의 병력을 잃은 1424년의 [[베르누이 전투]]에서 재앙을 맞닥드리기도 하였다. 대다수의 충성스러운 스코틀랜드 병력을 잃으며 상실감을 느꼈음에도 샤를 7세는 생존자들에 대한 노고를 치하했다. 스코틀랜드군은 1429년 [[헤링스 전투]]에서 더 많은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내 스코틀랜드군들은 자유 용병대들 (프랑스의 골칫거리)로 분열되거나 프랑스 육군의 [[콩파니 도르도낭스]]로 편입되기도 하였다.
 
=== 왕실 호위대 ===
[[File:Garde Ecossaise Louis XIII (After Quesnel).jpg|thumb|[[루이 13세]] 시기의 가르드 에코세즈. [[샤를 8세]]와 [[루이 14세]] 통치 시기 사이에 입었던 군복.]]
[[File:French Gardes du Corps 1st Company Standard.jpg|thumb|upright|프랑스 왕실 근위대 제1 중대 “스코틀랜드 부대”의 군기]]
[[File:French Garde du Corps Uniform Plate.jpg|thumb|1757년 스코틀랜드 근위대의 군복]]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