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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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8일 완산주 장사(長史) 최웅(崔雄), 주조(州助) [[아찬]]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 등이 [[수도]] [[경주시|금성]]에 반란을 보고하자, [[헌덕왕]]은 최웅과 영충에게 관직을 하사한 후 장웅(張雄)을 선발대로, 위공(衛恭)·제릉(悌凌)은 그 뒤를 잇게 하고, [[김균정]]·김웅원(金雄元)·[[김우징]] 등이 삼군을 통솔하게 하였다. [[김충공]]과 윤응(允膺)은 [[관문성|문화관문]](蚊火關門)을 지켰다. 명기(明基)와 안락(安樂) 두 [[화랑]]이 종군을 청하기에 명기는 낭도들과 황산(黃山)으로, 안락은 시미지진(施彌知鎭)으로 가게 했다. 이에 김헌창은 장수를 보내 중요한 길목에 자리 잡고 관군을 기다렸다.
 
장웅은 도동현(道冬峴)에서, 위공과 제릉은 장웅과 합세한 후 [[삼년산성]]과 [[속리산]]에서, 김균정은 [[성주군|성산]](星山)에서 김헌창의 군대를 격파한 뒤 모두 [[웅진성]]으로 진격하였다. 사세는 기울어 [[포위]] 공격 열흘 만에 김헌창은 [[자살]]하고 부하들이 [[목]]을 잘라 [[머리]]와 [[몸]]을 따로 묻었다. 성이 함락되어 김헌창의 [[시체]]는 또 베어지고, 일가와 수뇌급 239명은 주륙당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석방되었다.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녹진]]에게 [[대아찬]]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삽량주]]에 속한 [[창원시#역사|굴자군]]은 지리적으로 장안국과 가까웠으나 가담하지 않아 7년 동안 [[조세]]를 면제하였다. [[825년]] 정월 아들 김범문이[[김범문]]이 [[북한산주]]에서 재차 반란을 일으켰지만 패사하였다.
 
== 계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