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니콜라오 5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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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화려했던 그의 치세는 1454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면서 빛바래지게 되었다. 1452년 늦은 봄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의 침략이 임박하자 도움을 요청하는 친서를 니콜라오 5세에게 보냈다. 이에 니콜라오 5세는 위기에 처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돕기 위해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대신에 그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10척의 교황령 함선을 제노바와 베네치아, 나폴리 함선들과 함께 보냈다. 하지만 그 전에 제국의 수도가 점령되면서 이들 함대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교황은 이 사건이 그리스도교 세계와 그리스 문학 모두의 참사라고 생각했다. 에네아 실비오는 이 참사는 ‘[[호메로스]]와 [[플라톤]]을 두 번 죽인 일’이었다는 글을 남겼다.
 
니콜라오 5세는 십자군 원정을 독려하고 이탈리아 국가들 간의 상호 적대감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는 수많은 서적들을 갖고 이탈리아로 오기 시작한 그리스 학자들로 인한 큰 결실을 볼 만큼 오래살지오래 살지 못했다. 1452년에는 [[스테파노 포르카리]]가 교황청을 전복하려던 음모를 꾸미다가 사전에 적발되어 진압되고 이에 관련된 모든 주모자가 처벌을 받았다.
 
1455년 3월 24일 니콜라오 5세는 [[통풍]]으로 선종했다.
 
== 생애 ==
1453년 1월 교황청은 니콜라오 5세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을 사전에 공격하여 모든 주모자들을 처형하였다. 5월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으로 [[오스만 제국]]에 의해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당하였다. 니콜라오 5세는 [[십자군|십자군 원정]]을 독려하였으나 무위로 끝났다. 교황령의 모든 영주들을 로마로 초대하여 평화 협정을 준비하였으나 이 역시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로디의 평화 협정은 영주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니콜라오 5세는 양보를 통하여 평화를 얻는 방법을 지향하였으나 재위 말기에는 여러 통치자들과의 마찰로 인해 그의 뜻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