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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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lang|ja-y|豊臣秀吉, とよとみ ひでよし / とよとみの ひでよし}}, [[1537년]] [[3월 17일]]<ref name="h"/> ~ [[1598년]] [[9월 18일]])는 [[센고쿠 시대]]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활약했던 무장, 정치가이며 [[다이묘]]이다.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전국 3영걸로 불린다. 또한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도요토미라는 성을 하사받기 이전에 '''하시바 히데요시'''({{llang|ja|羽柴秀吉, はしば ひでよし}})라는 이름을 사용했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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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노부나가의 [[주고쿠 지방|주고쿠]] 공략을 명 받아 [[하리마 국]]으로 진군했고, 하리마의 호족들은 히데요시 군에 굴복했다. 그들 중 고데라 가문의 가신 [[고데라 요시타카]](小寺孝高; 후에 [[구로다 요시타카]])는 히데요시에게 [[히메지 성]]을 양도하였고, 히데요시는 가신으로 맞이하였다. 일부 히데요시에 반기를 표한 세력은 제1차 [[고즈키 성 전투]](上月城の戦い)에서 멸하였다.
 
덴쇼 7년([[1579년]]) [[고즈키 성]]을 둘러싸고 주고쿠의 모리 가문과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비젠 국]], [[미마사카 국|미마사카 국]] 다이묘 [[우키타 나오이에]]를 복속시켜 모리 가문에 우위에 섰지만, [[셋쓰 국]]의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의 모반으로 인해 주고쿠 공략은 일시중단되었다.
 
덴쇼 8년([[1580년]]) 오다 가문에 반기를 든 하리마 [[미키 성]](三木城) 성주 [[벳쇼 나가하루]]를 공격하던 도중 [[다케나카 시게하루]]와 [[후루타 시게노리]](古田重則) 등 유력 가신을 잃었지만, 2년에 걸친 포위공격에 적들은 기아와 싸워야 했고, 마침내 항복하였다([[미키 전투]]). 같은 해 [[다지마 국]] [[야마나 아키히로]](山名堯熙)가 농성하는 [[아리코 산성]](有子山城을) 공략, 다지마 국을 오다 가문 세력하에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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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6월 27일]], 노부나가의 후계자 문제 및 영지 분할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기요스 성]]에서 회의가 열린다([[기요스 회의]]. 이 회의에서 오다 가문의 필두 가신 시바타 가쓰이에는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 노부나가의 3남 [[간베 노부타카]](神戶信孝, 후의 [[오다 노부타카]])를 천거했지만, 미쓰히데 토벌로 공을 세운 히데요시의 입김과 이케다 쓰네오키·니와 나가히데의 지지도 있어 히데요시가 천거한 적손 산보시(三法師, 후의 [[오다 히데노부]])로 결정되었다. 어린 산보시의 후견인으로서 간베 노부타카를 내세운 히데요시의 타협안에 시바타 가쓰이에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오다 가문의 영지는 노부나가의 2남 [[오다 노부카쓰|노부카쓰]]에게 [[오와리 국|오와리]], 3남 노부타카에게 [[미노 국|미노]], 조카 [[오다 노부카네|노부카네]](信包)가 [[이세 국|이세]] 북부와 [[이가 국|이가]]가 주어졌고, [[호소카와 후지타카]]는 [[단고 국|단고]], [[쓰쓰이 준케이]]는 [[야마토 국|야마토]], 다카야마 우곤·나카가와 기요히데는 본령 안도가 주어졌다. [[니와 나가히데]]]는 [[오미 국|오미]] 시가ᆞ다카시마의 15만 석이 가증되었으며, [[이케다 쓰네오키]]는 [[셋쓰 국|셋쓰]]의 아마가자키(尼崎)·오사카의 15만 석이 더해졌으며, [[호리 히데마사]](堀秀政)는 오미 사와야마(佐和山)를 받았다. [[시바타 가쓰이에]]도 히데요시의 영지인 [[오미 국]] [[나가하마 성]] 12만 석을 받게 된다. 히데요시 자신은 미쓰히데의 옛 영지였던 [[단바 국|단바]]ᆞ[[야마시로 국|야마시로]]ᆞ[[가와치 국|가와치]]의 28만 석이 더해졌다. 영지상으로는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필두 가신이었던 가쓰이에보다 우위에 놓이게 되었다.
 
=== 시바타 가쓰이에와의 대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