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르겐 몰트만: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Goliards (토론 | 기여)
Goliards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26번째 줄:
포로수용소에서 그는 아비투어(고등학교 졸업시험)을 칠 수 있는 교육을 받았으며 [[YMCA]]에서 세운 도서관에서 [[디트리히 본회퍼]]의 저작과 [[라인홀드 니버]]의 책들을 접했다.
종전 후 [[1948년]] 그는 독일로 돌아와 [[괴팅엔 대학교]] 신학부에서 개신교 신학을 공부했다. 당시 괴팅엔에서는 [[게하르트 폰 라트]]가 구약을, [[권터 보른캄]]이 신약을, [[에른스트 볼프]]가 교회사를 가르쳤다. 하지만 몰트만에게 당시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은 [[한스 요아힘 이반트]]였다.<ref>{{서적 인용|성1=몰트만|이름1=위르겐|제목=몰트만 자서전|출판사=대한기독교서회|isbn=9788951114175|쪽=64|판=1|url=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3104555|확인날짜=2018-01-25}}</ref> 이후 그는 (훗날 그의 아내가 된 엘리자베트 웬델과 함께) [[오토 베버]]의 박사후보생이 되었고 17세기 칼뱅주의자였던 모이제 아미라우트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를 받은 다음에는 [[독일 개신교회]]의 목사로 안수를 받아 1958년까지 [[브레멘]]에서 목회를 했다. 1958년부터 1963년까지 부퍼탈 교회 대학교(Kirchliche Hochschule Wuppertal), 1963년부터 1967년까지 [[본 대학교]], 1967년부터 1994년까지 [[튀빙엔 대학교]]에서 조직 신학을 가르쳤다. <ref>http://www.munzinger.de/search/portrait/J%C3%BCrgen+Moltmann/0/11731.html</ref>
 
==에큐메니컬 운동==
그는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를 일치시키기 위한 [[에큐메니컬]]운동에 앞장선 [[WCC]]에 큰 영향을 끼친 학자이다. 그는 1963년부터 1983년까지 개신교와 가톨릭교회의 성례와 직제를 일치 시키려는 WCC 신앙과직제위에 위원으로 참여하였고, 가톨릭교회의 개혁기관지인 콘칠리움(CONCILIUM)의 공동 출판위원직을 맡기도 했다. 그는 동방정교회의 신학을 취해 독특한 삼위일체론을 전개하여 에큐메니칼적 입장에서 WCC를 지지했다.<ref>김진만《동방정교회 신학과 WCC》총신대학교 신학과 석사논문</ref>
 
==위르겐 몰트만 저서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