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그레고리오 14세: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25번째 줄:
== 교황 선출 ==
1590년 9월 27일 [[교황 우르바노 7세]]가 선종한 후, 주교황령 스페인 대사 올리바레스는 자신의 주군인 [[펠리페 2세]]가 수용할 만한 교황 후보자인 일곱 명의 추기경 명단을 콘클라베에 제시했다. 콘클라베는 2달 동안 지지부진한 상태가 지속되다가 1590년 12월 5일 펠리페 2세가 제시한 일곱 명의 후보자 가운데 한 사람인 스폰드라티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스폰드라티 추기경이 방 안에서 십자고상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던 중에 [[알레산드로 다마스체니 페레티]] 추기경이 들어와 추기경단이 그를 교황으로 선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레고리오 14세는 프랑스의 침략에 대비해 군사들을 징집하고 자신의 조카 에르콜레 스폰드라티를 프랑스로 파견했다. 또한 그는 [[가톨릭 동맹 (프랑스)|가톨릭 동맹]]을 돕기 위해 매달 15,000 스쿠디를 보조금으로 보내주었다.
 
== 재위 기간 ==
그레고리오 14세의 짧은 재위 기간의 특징은 [[위그노 전쟁]]에서 가톨릭 세력을 지지하며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스페인 국왕과 마옌 백작의 사주를 받아 그는 1591년 3월 1일 프랑스 국왕 [[앙리 4세]]를 파문했다. 그는 1585년 [[교황 식스토 5세]]가 이단자인 앙리는 프랑스 왕위 계승은 물론 프랑스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할 자격이 없다고 한 선언을 되풀이 했다. 그가 스페인 추기경들의 도움을 받아 교황으로 선출된 영향도 있기는 했지만, 확고하게 스페인의 편에 서서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일련의 정책을 폐지했다.
 
그레고리오 14세는 프랑스의 침략에 대비해 군사들을 징집하고 자신의 조카 에르콜레 스폰드라티를 프랑스로 파견했다. 또한 그는 [[가톨릭 동맹 (프랑스)|가톨릭 동맹]]을 돕기 위해 매달 15,000 스쿠디를 보조금으로 보내주었다.
그레고리오 14세는 다섯 명의 추기경을 서임했는데, 그 중에는 그의 조카로 특무성성 장관이 되는 [[파올로 에밀리오 스폰드라티]]도 있었다.
 
그레고리오 14세는 다섯 명의 추기경을 서임했는데, 그 중에는 그의 조카로 특무성성 장관이 되는 [[파올로 에밀리오 스폰드라티]]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오랜 친구인 필립보 네리도 추기경에 서임하려고 했으나 필립보 네리가 자신은 그와 같은 영예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정중하게 사양했다.
 
== 생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