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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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제왕이 지녀야 할 자질이 보여 할아버지 [[강희제]]와 아버지 [[옹정제]]에게 인정을 받았다. [[1735년]](옹정 13년), 옹정제가 급사하자 [[저위비건법]]에 따라 황위에 올라 먼저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의 갈등을 조정하며 내치를 다진 후 대규모 정복 사업과 문화 사업을 펼쳤다. 문화 사업으로는 옹정제 때 [[마카오]]로 추방된 [[예수회]] 선교사들을 다시 불러들여 [[북경]]에 [[유럽|서양]]식 건물을 짓도록 허락한 것과 특히 예수회 수도사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에게 서양식 궁전인 [[원명원]]을 개·보수를 감독하게 한 것이 있다. 그 자신 역시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아 시와 서화를 즐겼고 각지의 시인과 화가들을 독려하였다. 특히 10년의 세월을 들여 고금의 도서를 수집하여 [[중국의 역사|중국 역사]]상 최대의 대편찬 사업인 《[[사고전서]]》를 편찬함으로써 고서적들을 많이 발굴케 하였으나 [[문자의 옥]]도 단행하여 청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책들은 모두 금서로 만들었다.
 
또한, 10차례에 걸친 정복 사업을 펼쳐 [[중가르 칸국|중가르]]와 [[위구르족|위구르]]를 복속시키고 [[티베트]], [[버마]], [[베트남]], [[네팔]]까지 진출하는 등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영토의 틀을 만들었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시대착오적인 정책을 내놓고 여기에 사치, 반란, 서방과의 부실한 외교, 그리고 희대의 탐관오리로 평가받는 [[화신 (청나라)|화신]]을 20여 년간 총애하여 말년엔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빈번히 일어나고 국고가 비어 결국 청나라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795년]](건륭 60년) 말, 자신은 감히 할아버지인 강희제의 재위 기간을 넘을 수 없다며 재위 60년째에 [[태상황제]]로 물러났지만, 막후에서 정책 최고 결정권을 행사하여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었다. 재위기간 60년에 태상황제로서 실권을 장악한 4년까지 합치면 건륭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실권을 장악한 황제였다.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 열 번의 원정을 모두 승리로 이끈 노인)이라 칭하고 그렇게 불리기를 좋아하였으며, 중국 최후의 태평성세인 [[강건성세]](康乾盛世)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장수한 황제이며 [[중국]] 최후의 [[태상황제]]로 그의 생모와 신분, 즉 [[한족]]의 피가 흐르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어서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민간의 전설과 야사가전설이 많은 황제이기도 하다.
 
== 생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