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치히 논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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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eipziger Disputation.jpg|right|thumb|250px|마르틴 루터와 에크 사이의 라이프치히 논쟁을 그린 당시의 삽화]]
'''라이프치히 논쟁'''(Leipziger Disputation 또는 Leipzig Debate)은 독일에서 종교개혁 당시 1519년 6월 27일∼7월 16일에 [[마르틴 루터]], [[안드레스안드레아스 칼스타트카를슈타트]], [[필리프 멜란히톤]]과 로마 가톨릭교회를 대변하는 잉골슈타트(Ingolstadt) 대학교 교수이며 한 때 루터의 친구였던 [[요한 에크]] (Johann Eck)라는 [[신학자]]가 [[라이프치히]]에서 [[연옥 (기독교)|연옥]]교리, [[면죄부]] 판매, [[고해성사]], 교황의 권위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인 역사적 사건을 말한다.<ref>{{서적 인용|last=Kolb|first=Robert|title=Martin Luther|year=2009|publisher=Oxford University Press|location=New York|isbn=0199208948|page=24}}</ref> 여기서 루터는 [[오직 성경]]만이 기독교 신앙의 기초(basis of Christian belief) 이며, 교황은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고 성경에도 언급되지 않았으며, [[연옥]]은 성경에도 없는데 그곳에 있는 기간을 단축하기 위하여 성도들에게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루터는 교회의 권위가 아닌 성경의 권위를 분명하게 주장하였다.<ref> Bernhard Lohse, Martin Luther (Fortress Press, 1980), 47</ref> 논쟁의 결과 루터는 이단으로 낙인 찍히고 결국 루터의 [[종교 개혁|종교개혁]]의 도화선(導火線)이 되었다. 결국 이 논쟁의 핵심은 [[면죄부]]를 정당화하는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지않고 <ref>파울 슈레켄바흐 와 프란츠 노이베르트, 《마르틴 루터》 (예영커뮤니케이션, 2003), 57</ref> 성경에 근거한 교회의 가르침을 세울것을 주장한 것이다.<ref>김재성, 《종교개혁의 신학사상》 (CLC, 2017), 170-172</ref>
 
[[파일:Leipziger Disputation 1519.jpg|right|thumb|250px| 막스 셀리거 작품 (Max Seliger, 1865–1920)]]
==배경==
종교개혁이 확산되자 [[교황 레오 10세]]는 시종 밀티츠를 교황청의 특별한 호의의 징표인 황금 장미를 가지고 프리드리히에게 보내어 타협안을 제시했다.<ref>[http://www.lck.or.kr/contents/sub0706.php 라이프찌히 논쟁]</ref> 밀티츠는 [[면죄부]] 판매원인 [[요한 테첼|테첼]]을 만나 위로하였고 루터가 교황청에 협조한다면 추기경에 봉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루터는 교황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을 중지하면 교황청도 침묵하겠다고 약속하였지만, 1519년 6월 18일 스페인의 칼알 5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바람에 이러한 합의는 불발로 끝났다. 1518년 루터의 동료이자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비텐베르크 대학]] 교수인 칼슈타트가카를슈타트가 성경의 권위가 교회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하자 에크는 공개토론을 요청하여 마침내 역사적인 라이프치히 논쟁이 시작된다. <ref>[[오덕교]],《종교개혁사》(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2007), P. 77-79)</ref>
 
== 참석 분위기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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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 장소의 결정는 양측의 타협으로 이루어졌다. 원래 비텐베르크 신학자들은 에크와 변론을 위해 비텐베르크로 에크를 초청하였으나 거부하고 에크측에서 퀼른(Koeln)이나 파리나 로마를 원했지만 루터가 거부하였다. 에크는 6개월 전에 이미 변론의 기초적인 문제를 발표하였다고 루터는 교회사 관련 연구로 준비를 하였다.<ref>지원용, 《말틴 루터: 생애와 사상》 (컨콜디아사, 1994), 104-105</ref>
작센의 게오르게 공작은 공개적 논쟁으로 신학적 토론을 명료화하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대중적인 모습을 훌륭하게 만들어 줄것으로 기대하였다.<ref>[[헤르만 셀더하위스]], 《루터: 루터를 말하다》 (세움북스, 2016), 199 </ref>
뛰어난 신학자이며 로마법에 전문가인 로마 가톨릭측의 J. 에크가 먼저 도착하여 라이프찌히 시의회가 제공한 76명 호위병의 호위를 받으며 시가를 왕래했다. 며칠 며칠후에후에 칼스타트는카를슈타트는 오는 도중 마차의 바퀴가 빠지는 것도 감수하고 증거로 사용할 여러 책을 가져 왔고,<ref>[[헤르만 셀더하위스]], 《루터: 루터를 말하다》 (세움북스, 2016), 201 </ref> 멜랑히톤, 루터, 비텐베르그 교목, 바르님 폰 포메렌(Marim von Pommeren) 공작을 비롯한 6명의 비텐베르그 일행은 며칠 뒤 무기로 무장한 200명의 학생들과 함께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라이프치 도시에 도착했다.<ref>Will Durant, The Reformation (Simon and Schuser: New York, 1957), 350 </ref> 토론이 라이프찌히 성의 강당에서 벌어졌다. 첫날 모든 사람은 성 토마스 교회의 여섯 시 미사에 참석했고 오후에는 회의 진행에 관한 규칙들에 관해 논쟁을 벌였다. 한 증인은 당시 논쟁자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마르틴은 중간 키에 걱정과 연구로 몸이 야위어서 살갗 위로 드러난 뼈를 거의 다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남성적 힘에 넘쳤고 가슴에 파고드는 힘찬 목소리(clear, penetrating voice)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학문이 풍부했고 성경을 손 끝에 잡고 마음대로 구사했다. 그는 다정하고 친절했으며 완고하거나 오만하지 않았다. 칼슈타트는카를슈타트는 루터보다 키가 더 작고 얼굴은 찌들은 청어(smoked herring) 모습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굵고 불쾌했다. 그의 기억력은 더디었으나 성내는 데는 급했다. 에크는 가슴팍이 벌어진 육중한 몸과 독일어 악센트의 힘찬 목소리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분명하지 못했고 오히려 거칠었다. 그의 두 눈과 입과 얼굴 전체의 모습은 신학자라기 보다는 백정(butcher)을 연상하게 했다.”<ref>[http://www.christiantoday.co.kr/news/178331 [[김명혁]] 칼럼]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 (7), 크리스천투데이]</ref>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