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사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43번째 줄:
== 전투 ==
[[파일:Tsugumichi Saigo 2.jpg|140px|thumb|사이고 주도]]
타이완 출병에 대해서는 정부 내부나 영국공사 [[해리 파크스]]와 미국 공사 드롱의 후임인 존 빙햄(John Bingham) 등의 반대 의견도 있었다. 특히 참의 [[기도 다카요시]] 등의 조슈 번 계열의 인사는 [[정한론]]을 부정하면서, 대만에 파병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반대의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4월 18일]], 기도 다카요시는 사표를 제출하고 참장직을 하야했다물러났다. 따라서 정부는 일단 파병 중단을 결정했다.
 
그러나 사이고는 독단으로의 출병을 강행했고, 나가사키에 대기하고 있던 정토 군 3,000명을 출동시켰다. 정토군은 2개 대대였으며, 그 중 친다이 병은 1개 대대였고, 나머지는 ‘식민병’으로 사쓰마 등 규슈 각지의 사족으로 점령지 영주를 전제로 모집, 편성한 것이었다. [[5월 2일]] 사이고의 명을 받은 다니간 성(谷干城), [[아카마쓰 노리요시]]가 이끄는 주력군이 [[에도 막부]]로부터 계승한 작은 군함 3척으로 나가사키를 출항하자 정부도 어쩔 수 없이 이를 추인하였다.<ref group="주해">군함 3척은 다카사고마루, 다이우(大有), 메코(明光)였다. 또한 [[오쿠보 도시미치]]를 중국에 보낸 것은 기함 [[류조 (철갑함)|류조]]와 군함 [[쓰쿠바 (코르벳)|쓰쿠바]]였다.</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