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피뇨 드 베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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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9년]]에 박해를 피해 임시로 [[인도]]의 [[퐁디셰리]]에 가서 아도란 주교에 임명된다. 1775년 하띠엔으로 돌아가 [[떠이선 왕조|떠이썬의 난]]으로 추방된 [[응우옌 푹 아인]](阮福暎: 이후 [[자롱제]])과 만나 적극적으로 그를 도운다.
 
1787년 응우옌 푹 아인의 아들 [[응우옌 푹 까인]](阮福景)과 함께 프랑스로 귀국한다. [[루이 16세]]를 만나 프랑스와 베트남 동맹을 맺기 위해 노력한다. 그 내용은 4척의 호위함과 1650명의 군대를 파견하고 대신 [[꼰다오 섬]]과 투론(현재의 다낭)의 양도와 프랑스의 독점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원정군의 편성은 인도 주재 콘웨이 미군 사령관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래서 피뇨는 무기와 의용군을 모집하여 1789년 코친차이나로 돌아가서 떠이선(서산당)과 싸웠지만, 서산당의 거점인 [[꾸이년]]을 공격하는 동안 붙잡혔다. 더위와 피로로 쇠약해져 [[이질]]에 걸린 그는 5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의 시신은 군령을 가지고 맞이했고, 응우옌 푹 아인이 조사를 읽었다. 사이공에 있던 피뇨의 무덤은 1983년에 베트남 정부에 의해 철거되었고, 시신은 화장을 해서 프랑스로 보내졌다. 현재 [[파리 외방전교회]]에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동행한 프랑스인들은 [[응우옌 푹 아인]]에게 유럽식 군사 기술을 가르치는데 공헌했다. 피뇨 주교는 프랑스와 베트남의 정치적 관계를 구축한 인물이었다. 이를 계기로 인도에서 영국에 패배한 프랑스는 베트남 진출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