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라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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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사진을 보면 [[모란봉]](牡丹峰) 쪽에서 [[능라도]](綾羅島)와 연결하는 다리가 나오는데,<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97843&CMPT_CD=P0001 대한민국 최고령 현역작가 하반영(河畔影) 화백을 만나다] ohmynews 2012.02.16 : 하반영 화백이 1940년 9월에 찍었다는 평양 사진에 나온 다리는 [[양각도]]를 지나는 경의선의 [[대동강철교]]가 아니라 벽라교이다.</ref> 능라도 수원지에서 정제된 물을 평양시내에 공급하기 위해 대형 수도관을 부설한 다리였다.
다리의 정확한 건설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능라도 수원지에서 물을 공급하기 시작한 것이 1910년부터이므로<ref>[https://www.bigkinds.or.kr/resources/OLD_NEWS_IMG3/HSS/HSS19061019u00_02.pdf 雜報 / 水道測量] 皇城新聞 1906년 10월 19일 02면 05단<br>[https://www.bigkinds.or.kr/resources/OLD_NEWS_IMG3/HSS/HSS19070123u00_02.pdf 雜報 / 水道及島嶼測査] 皇城新聞 1907년 01월 23일 02면 04단<br>[https://www.bigkinds.or.kr/resources/OLD_NEWS_IMG3/HSS/HSS19090807u00_03.pdf 雜報 / 可謂慈航] 皇城新聞 1909년 08월 07일 03면 02단<br>[https://www.bigkinds.or.kr/resources/OLD_NEWS_IMG3/DMD/DMD19100807u00_03.pdf 불원간 수통물 분급] 대한매일신보 1910년 08월 07일 03면 05단<br>[https://www.bigkinds.or.kr/resources/OLD_NEWS_IMG3/HSS/HSS19100622u00_03.pdf 雜報 / 西道旅行記 (續)] 皇城新聞 1910년 06월 22일 03면 01단</ref> 그때 처음 부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1918년 신문기사에 벽라교(碧羅橋)라는 명칭이 보인다. 일각에서는 이 다리가 청류벽(淸流壁)과 능라도(綾羅島)를 연결하는 다리라서 벽라교(壁羅橋)라고 했다고 하나,<ref name="alum">[http://cafe.daum.net/pyungkobo/aK4s/2 평양시민회와 발자취] 평양고보 동문 카페</ref> 해방 전 신문기사들에는 벽라교(碧羅橋)로 나오므로,<ref>[https://www.bigkinds.or.kr/resources/OLD_NEWS_IMG3/MIN/MIN19180208u00_03.pdf 大同江 一部 解氷, 오는 6일경에는 다 풀려] 每日申報 1918년 02월 08일 03면 04단 : 벽라교(碧羅橋)<br>[https://www.bigkinds.or.kr/resources/OLD_NEWS_IMG3/MIN/MIN19200426u00_04.pdf 各支局通信欄: 浿城을 一週하고] 每日申報 1920년 04월 26일 04면 02단<br>[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88438821 三十隻の屋形船で大同江の舟遊び, 出林大會一行を迎へて] 朝鮮新聞 1926.10.15 3면</ref> [[부벽루]](浮碧樓)와 [[능라도]](綾羅島)에서 따온 이름일 수도 있는 것 같다. 일반에서는 통칭 수도국(水道局) 다리로 불렸으며,<ref name="alum"/><ref>[[이태준|이태준(李泰俊, 1904~?)]], [https://books.google.co.kr/books?id=OJ_TBAAAQBAJ&pg=PT253&lpg=PT253&dq=%EC%88%98%EB%8F%84%EA%B5%AD+%EB%8B%A4%EB%A6%AC&source=bl&ots=kIGzQWMmNw&sig=w1nbStlf7zUUUrQuE5R5_B-VoSI&hl=ko&sa=X&ved=0ahUKEwjqhOfwi4jZAhXEV7wKHZJDCc0Q6AEIMzAF#v=onepage&q=%EC%88%98%EB%8F%84%EA%B5%AD%20%EB%8B%A4%EB%A6%AC&f=false 해방전후: 이태준 단편전집 2 (한국문학을 권하다 18) : "패강랭(浿江冷)"] 애플북스, 2014.09.22</ref> 수도교(水道橋)라고도 했다. 차량 통행은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월남민들의 증언으로 볼 때 이 다리는 해방 때까지는 있은 것으로 보이나, 오늘날에는 없다.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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