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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일제 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서린정(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 출신이다. 아버지 [[백낙승 (1886년)|백낙승]]과 어머니 조종희 사이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후 종로구 창신동 197번지 소위 "큰대문집"에서 18세까지 살았다. 수송국민학교와 경기제1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면서 피아니스트 [[신재덕]]에게 피아노 연주를, 작곡가 [[이건우]]에게 작곡을 각각 배웠다. 이때 한국이 낳은 작곡가 [[김순남]]을 사사했다. 1949년 그는 홍콩 로이덴 스쿨로 전학했으며,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가족이 [[일본]]으로 이주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52년 [[도쿄 대학교]] 문과부에 입학했다. 2년 후 미술사학 및 미학으로 전공을 정했지만, 실제로는 일본 당대의 작곡가 모로이 사부로, 미학자 노무라 요시오 등에게서 [[작곡]]과, [[음악사학]]을 공부했다. 졸업 논문은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이다.
 
1956년 백남준은 졸업과 함께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 대학교]] 및 [[쾰른 대학교]] 등에서 서양의 건축, 음악사, 철학 등을 공부하였다. 뮌헨 대학교 입학 1년 후에는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으로 옮겨 볼프강 포르트너 교수에게 배우지만, 곧 쇤베르크 이후 [[현대음악]]의 실험이 활발히 진행되던 [[다름슈타트 하기 강좌]]에 참여했다. 1958년 그 곳에서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를 만나 그의 음악에 대한 파괴적 접근과 자유정신으로부터 깊은 영감을 얻었다. 이 영감은 "세계의 역사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주어진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꿔라" 라는 것으로 규정된다. 이후 1950년대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독일 라인 지역의 [[실험음악|액션뮤직]]의 현장에서 백남준은 ‘아시아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앨런 카프로]])라고 불릴 정도의 탁월한 퍼포먼스 아티스트로 활약했다.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에서 음악적 콜라주와 함께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바이올린을 단숨에 파괴하거나(바이올린 솔로) 존 케이지가 착용한 넥타이를 잘라버리는 퍼포먼스(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가 특히 유명하다. 이 초기 퍼포먼스에 대해 백남준은 스스로 "충격, 표현주의, 낭만주의, 클라이맥스, 놀라움, 기타 등등을 보여준 것"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1961년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의 음악 퍼포먼스 ‘오리기날레’에서 머리와 넥타이로 잉크를 묻혀 두루마리에 흔적을 남기는 독특한 퍼포먼스 [[심플]] [[머리를 위한 선]]을 보여주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 [[조지 마키우나스]], [[요셉 보이스]] 등과 의기투합하여 [[플럭서스]] 활동을 함께 전개했다. [[다다이즘]]에 영향을 받은 플럭서스는 헤라클레이투스가 주장한 ‘변화 생성의 흐름’ 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목적이 없는 자유, 실험을 위한 실험"이라는 명목 하에 이벤트와 퍼포먼스 그리고 전위음악에 주력했고, 곧 유럽과 아시아 및 미국 등 세계로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