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선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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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연극 경연 대회에 작품을 출품하여 일제에 협력하는 활동을 했다. 조선총독부가 친일 연극 단체로 결성시킨 [[조선연극문화협회]]의 이사를 맡았으며, 지원병 제도를 찬양하는 《동백꽃 피는 마을》을 발표하고 관제 연극경연대회에는 《빙화》, 《꽃피는 나무》, 《상아탑에서》를 잇따라 출품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광복 후 한동안 작품을 쓰지 못하다가 [[1945년]] 12월에 〈그 여자의 반생〉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이후 [[남로당]] 계열에서 활동하였으나 [[김두한]]에 의한 [[심영 (배우)|심영]] 테러가 공공연히 자행되는 등 활동이 불가하게 되자, [[1948년]] 경 부인 문예봉을 뒤따라 월북했다. [[미군정]] 시기의 활동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데, 이 무렵 건강이 좋지 않았다는 설과 함께 멜로극 위주의 통속물 작가였던 임선규가 급격히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작풍으로 전환하기에는 정치적 신념이 그리 견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이분석이 있다.
 
[[북조선]]에서의 활동은 잘 알려진 바가 없다. 일찍부터 앓고 있던 [[폐결핵]]으로 인해 [[1970년]] 봄에 사망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보다 훨씬 전인 월북 후 공바로 객사했다는 설과 [[주을온천]]에서 요양 중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있어 사망 시기도 분명하지 않다. 문예봉과는 달리 북조선의 문예사 기술에서 임선규의 존재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