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영종 (9대):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51번째 줄:
일찍이 인종은 형 무종 [[카이산]]의 황태제로 있으면서 조카에게 제위를 넘겨줄 것을 약속한 바 있었다. 그러나 무종 사후에 그의 두 아들인 [[쿠살라]]와 [[투그테무르]]는 황실의 냉대를 받은 끝에 변방으로 유배당했고, 그들을 지지한 장교단 역시 숙청되었다. 시디발라가 태자로 옹립된 배경엔 흥성태후와 그녀를 보좌한 테무데르 일파의 책동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는데, 이는 무종계 세력을 배척하는 동시에 시디발라의 모친이 태후와 같은 [[온기라트|훈기라드]] 씨족이었던 만큼, 어린 후계자를 조종하기 한층 수월할 것이란 계산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본래 시디발라는 자신을 태자로 세우려는 흥성태후에게 스스로 어리고 능력이 없다는 이유를 들면서 대통은 쿠살라가 이어받아야 마땅하고, 그를 보좌하겠다며 고사했으나, 결국 태후의 의지대로 관철되었다.
 
연우 7년([[1320년]]) 정월, 인종이 붕어하자 시디발라는 즉위에 앞서 선제(先帝)의 상(喪)을 주관하게 되었다. 이 공백기를 틈타 흥성태후는 테무데르를 중서우승상으로 복직시키고, 중서성 인사에 대한 물갈이를 통해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고자 기도하였다. 같은 해 3월 10일, [[대도]]의 대명전(大明殿)에서 즉위한 영종은 다음달에 [[칭기즈 칸]]의 원훈 [[무칼리]]의 후손으로 태자 시절부터 교유해왔던 바이주(拜住)를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로 기용한 데 이어서 중서좌승상으로 승진시키면서 테무데르의 전횡을 견제하고, 태후 직속 기관인 휘정원에 압력을 가하는 등 실권 회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연우 7년([[1320년]]) 정월, 인종이 붕어하자
 
[[1322년]] 흥성태후와 테무데르의 죽음은 그가 집권하게 하였다. 그는 [[온기라트|훈기라드]] 족을 새 행정부에서 구동하려고 하였다. 그는 테무데르의 경쟁자이며 안퉁의 손자인 잘라이르의 바이주를 비서실장으로 임명하였다.
 
[[1323년]] 8월, 그가 [[상도 (지명)|상도]]의 여름궁에서 대도의 겨울궁으로 이동하다가 남파(南波)에 머물 때 영종과 바이주는 테무데르의 양자 테그시에 의해 암살되었는데 그는 아수드 위병과 그의 부하인 다른 군인들과 함께 대칸의 오르도를 공격하였다.([[:zh:南坡之变|남파의 변]], [[13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