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우치 가즈토요: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75번째 줄:
=== 도요토미 막하의 소다이묘로서 ===
노부나가의 사후에도 그래도 히데요시의 가신으로서 활약했다. 덴쇼 11년([[1583년]])의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는, 그 전초전인 [[이세 국|이세]](伊勢) [[가메야마 성 (미에현)|가메야마 성]](亀山城) 공격에서 제일의 공적을 올렸다. 또 다음 년 12년([[1584년]])의 [[고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의 참가의 때에는 히데요시로부터 명령을 받아 이에야스를 포위하기 위한 부성 구축을 담당하였다. 이 후 히데요시의 조카 ·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의 숙로가 되어 덴쇼 13년([[1585년]])에는 [[와카사 국]](若狭国) [[다카하마 성]](高浜城)의 성주, 곧 오미
텐쇼 18년([[1590년]])의 [[오다와라 정벌
[[임진왜란]] 때에는 히데쓰구의 숙로격이었던
히데요시의 사후인 [[게이초]](慶長) 5년([[1600년]])에는 [[고다이로]](五大老)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겨 [[아이즈]]의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의 토벌에 참가해, 이에야스가 비운 사이에 [[고부교]](五奉行)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등이 거병하자 동군에 가담하였다. 이 사이에, 가쓰토요는 [[시모쓰케 국]](下野国) 오야마(小山)에서 있었던 군의에서 제장이 동군, 서군에의 거취를 방황하는 중에, 맨 먼저 자신의 거성인 [[가게가와 성]](掛川城)을 이에야스에게 제공하는 뜻을 발언해 환심을 샀다. 이 거성을 제공하는 안은 호리오 다다우지와 사전에 협의했을 때에는 호리오가 제안하기로 한 것을 가로챘다고 한다.(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번한보(藩翰譜)" 단 [[도카이]](東海)도 출신의 다른 다이묘인 나카무라 가즈우지가 죽음의 문턱에 있었고, 동시에 다다우지의 아버지 호리오 요시하루도 자객에게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 있던 등 노련한 세대가 행동력을 잃고 있는 가운데 주변의 세력이 동군에 붙는 것을 가즈토요가 적극적으로 정리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미카와 국]](三河国) 요시다 성(吉田城)의 성주인 [[이케다 데루마사]](池田輝政)등도 이 시기, 가쓰토요와 가끔 접촉하고 있어, 이런한 협의를 하고 있었다고 고려되고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본전에서는 모리(毛利) · 조소카베(長宗我部)군 등의 견제를 담당해, 이렇다할 공훈은 없었지만 전투 전의 공적을 높게 평가받아 도사 국 1국 · 9만 8000석(다이코 검지의 때에 조소카베 일족이 제출했던 석고, 후에 야마우치 일족 자신의 검지에서 20만 6000석여의 석고를 보고하였다.)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