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투리아 민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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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켄투리아 단위로 투표를 해 [[집정관]], [[법무관]] 중요한 재판, 전쟁 등 시정의 중요 사항이 토의되었다. 이처럼 군사 조직과 시정 운영이 묶여 있었기 때문에 로마 시민 형성한 공동체가 전쟁을 통한 [[호플리테스]]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켄투리아는 ‘백’이라는 의미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100명의 정원 충족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산에 따라 나누어진 6개 계급의 구별이 우선되었고, 거기에서 각각의 켄투리아로 균등하게 배분되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군대가 [[포메리움]]이라는 로마 성벽 내에 들어가는 것이 예로부터 금지되었다. 원래 이 국민위원회의 성립이 군사 조직이었기 때문에 시내에서 켄투리아 민회를 여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 대신 로마 지역의 캄푸스 마루티우스(Campus Martius, [[마르스])]의 땅)라는 곳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며 로마의 거주지 범위가 확산되었고, 캄푸스 마루티우스가 실질적으로 로마 시내가 되어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투표권은 시민 각자에게 있던 것은 아니었고, 하나의 켄투리아에 하나의 투표권이 있었다. 그 투표 의사는 각 켄투리아에 달려 있었고, 따라서 계급에서 분리된 켄투리아는 그 계급의 대다수의 의견이 반영되었다. 그러나 193개 중 98개가 귀족 등 부유층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난한 계급의 의견이 국민위원회에서 반영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