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68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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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혁명'''({{llang|fr|Mai 68}}, {{lang|en|May 68}}, {{llang|de|Mai 68}}), 또는 '''프랑스 5월 혁명'''은 [[프랑스]] [[샤를 드 골]] 정부의정부에 실정과대항하는 사회의 모순으로 인한 [[저항운동]]과시위와 총[[파업]] 투쟁을 뜻한다. 이 혁명은 [[교육]] 체계와 [[사회문화]]라는 측면에서 "구시대"를공산주의적 뒤바꿀성향을 수 있는 기회로 보였다지닌다. 즉, 68 혁명 또는 5월 혁명은 자유진영의 가치와 질서에 저항한반항한 사건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68 혁명은 [[미국]], [[일본]], [[서독]] 등 수많은 자본주의 국가에 개혁공산화에 대한 의지를 파생시켰기 때문에 프랑스에만 국한된 운동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파리 (프랑스)|파리]]의 몇몇 대학교와 고등학교, [[대학]] 행정부와 [[경찰]]에 대한 [[학생]] [[봉기]]로 시작했다. 드 골 정부는 경찰력을 동원해 저항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이는 운동의시위의 열기만 점화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라틴 지구의 경찰과의 가두 전투를 일으켰고, 결국 프랑스 전역의 학생과 파리 전 [[노동자]]의 2/3에 해당하는 노동자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드 골 정부는 이러한 시위자들에 대항해서 군사력을 동원했고 [[의회]]를 해산했으며 [[1968년]] [[6월 23일]]에는 다시 [[총선]]을 실시했다.
 
이즈음 정부는 붕괴되기 직전이었고 드 골은 [[독일군]] 주둔의 비행 기지로 잠시 피신하기까지 했으나, [[혁명]]적인 상황은 지속되지 못했고 좌파연합인 노동총연맹(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과 [[프랑스 공산당]](Parti Communiste Français, PCF)의 실책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복귀했다. 6월에 [[총선]]이 이루어지고 나서 드 골의 [[정당]]은 이전보다 더 힘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드 골은 이듬해 물러나고 말았다.
 
저항자들에게공산주의자들에게 1968년 5월 혁명은 실패였으나,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에서는 [[종교]], [[애국주의]], [[권위]]에 대한 복종 등의 보수적인 가치들을 대체하는 [[평등]], [[성해방]], [[인권]], [[공동체주의]],우파적인 [[생태주의]]가치관 등의대신 진보적인좌익적 가치들이가치관이 사회의 주된 가치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이러한 경향이 현재의 프랑스를프랑스까지 주도하고이어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단 한달 동안에만 일어난 것은 아니고, 68년 5월 혁명은 이러한 가치의 이동의 대명사가 되었다.
 
== 신좌파 ==
프랑스 공산당으로 대표되는 당시 구좌파들이 시위주도세력을 조롱하고 시위세력들은 프랑스 공산당에게 상당한 적대감을 표시했던 것은 유명하다. 68 혁명의 주도세력의 문제는 그것이 누구냐를 놓고 논란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나 대개 '[[신좌파]]' 즉, 신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이 '구좌파'와 어떻게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 이다. 일단 신좌파운동을 펼치고 신좌파로 불린 이상 공통점이 앞선다고 할 수 있다.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또 다른 시각을 보일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구좌파나 신좌파나 동일한 목적과 지향점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는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에서 각인시켜 놓았듯이 모든 인간의 해방 즉, 자유로운노동자들의 인간들의공산주의 평등한 세상을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사회주의와 구좌파는 만민평등에까지공산화에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노동자 해방에서 멈추고 말았다. [[스탈린]]식 공산주의는 비록 무상의료,무상교육 등 복지제도를 최초로 도입하고 [[사회적 인권]]보장에 기여했으나, 관료주의와 자유의 억압으로 사회가 활력을 잃어버렸다. 신좌파가 "굶어죽을지라도 지루한 건 못참겠다"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는 풍요로운 자본주의에 대한 염증과 권태에도 해당되지만- 이 해방과 자유 이념은 사회 전역에 걸쳐 퍼져나갈 수밖에 없는 시점에 도달했던 것이다. 신좌파는 이를 발전적으로 계승하기 위해 [[혁명운동]]에 앞장섰다.
 
신좌파는 구좌파와 마찬가지로 소수 기득권자에 의한 대중의 정치, 경제적 억압과 착취를 단호히 반대했다. 그러나 신좌파는 구좌파와 달리,[[억압]]과 [[착취]]의 개념을 더넓게 해석해서, 문화적 착취, 관료적 억압, 성적 억압, 인종적 착취까지 모두 비판한 것이다. 요컨대 신좌파는 구좌파가 중시했던 경제적, 정치적 문제뿐 아니라, 여성억압, 아동학대, 대중문화등 일상의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신좌파는 구좌파와 달리 단일대오의 일사불란한 조직적 행동보다는 다양한 대중의 직접행동 정치를 강조했다. 탄압이 심해지면서 소수 전위에 의한 무장투쟁으로 비화되기도 했지만 위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추구했던 신좌파는 연좌농성, 토론집회, 공공장소 점거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하고 대의를 관철시켜 나갔다. 이런 차이는 인적 구성자체에 기인했다고도 볼 수 있다. 신좌파의 중추세력은 학생청년, 소수자, 다인종, 여성, 그리고 [[룸펜프롤레타리아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사회주의 좌파운동의 대의와 목적이 [[해방]]과 [[평등]]이라는 이념으로 수미일관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신좌파는 구좌파의 지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고 이를 변증법적으로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동시에 인간의 해방과 평등은 모순과 차별로 가득한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로 계속 [[진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ref>유강은 역, 《공산당선언》, 그린비, 143, 145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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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해방뿐 아니라 모든 인간 특히 주변부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와 해방을 추구했다. 물론 구좌파의 제도적 경직성과 권위주의는 지양하면서 자본주의의 물신성, 야만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철퇴를 가했다.
신좌파는 하나의 이념으로 결속된 단일세력이 아니었기에 노선에따라 분화되었다.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마오쩌둥주의자 등으로 나뉘었다. [[직접행동|직접행동 민주주의]], 혁명적 투쟁을 중시한 신좌파는 제도정치권에 참여하기보다 주로 반체제 비판 세력으로 남았다. 그러나 68 혁명의 영향을 크게 받은 [[환경운동]]단체들이 본격적으로 정치무대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주목을 끌었다. <녹색당>은 프랑스와 독일에서 모두 좌파연립정부 구성에 참여했다. 이처럼 진보의공산주의 다원적 구축은 유럽사회에사회에 큰 활력소가 되었다. 68 혁명이 유럽의 정치권을 완전히 뒤바꾸지는 못했지만 공산주의 문화에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68 혁명이 유럽의 정치권을 완전히 뒤바꾸지는 못했지만 기존의 정치문화에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또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일상에서 소외되어 살아가던 평범한 시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삶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지구적 조용한 참살이([[웰빙]]) 바람도 68 혁명의 영향이 아닐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현실사회주의의 한계를 모두 극복하고 더 나은 삶과 가치를 추구했다는 것은 인류의 이상이자 영원한 자원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지금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세계화에 대안적 사상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68 혁명은 살아있고 현재진행형이다. <ref>임영태 《인류이야기2》 아이필드, 158, 160쪽</ref>
 
== 비판적 시선 ==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과거 그들의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의 주도권을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세력에 빼앗기는 상황에 불편함을 감출 수 없었다.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에 짓밟힌 굴욕감과, 해방이 자주적으로 얻어낸 것이 아닌 미국의 승전으로 얻어진 데 대한 좌절감으로부터 벗어나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할 만한 돌파구가 필요하였다.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미국과 베트남의 전쟁에 대한 반전 운동을 전개하기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도덕적 우월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일 뿐 정작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 지배 시절에 그것의 해체를 위해 노력한 적은 없었다. 베트남은 10년간의 대프랑스 독립 전쟁의 결실로 독립할 수 있었다. 68혁명은 결국 식민주의자들의 자손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반성하기는 커녕 훔쳐온 재산으로 배부른 소리하며, 남의것을 또 다시 탐내는 모양새에 불과했다. 공산주의자와 침략자들의 나쁜점만 모아놓은 사건인 셈이다.
 
== 슬로건과 그래피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