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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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가타케 전투 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회유할 목적으로 조정을 통해 그에게 정4품 하계 좌근위권중장(左近衛權中將) 벼슬을 제수했는데, 이는 종5품 하계였던 히데요시보다 더 높은 직위였고, 노부카쓰와는 같은 직위였다.<ref name="이길진122"/> 하지만 이에야스는 이를 거부했고, 히데요시가 종3품인 참의(參議)로 이에야스를 천거하자 오히려 화를 냈다.<ref name="이길진122"/> 그러자 히데요시는 노부카쓰의 유능한 세 중신에 대한 모략을 퍼뜨려, 노부카쓰가 중신들을 죽이게 하였으며, 이어서 히데요시가 노부카쓰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려 노부카쓰 진영을 동요하게 하였다.<ref name="이길진122"/> 노부카쓰가 이에야스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1584년 3월 이에야스는 오다 측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ref name="이길진122"/><ref name="요시다68">요시다 외, 68쪽</ref> 이에야스는 출전에 앞서, [[아키 국]]의 [[모리 데루모토]], [[시코쿠]]의 [[조소카베 모토치카]], [[엣추 국]]의 [[삿사 나리마사]] ({{lang|ja|佐々成政}}) 등과 동맹을 맺어 히데요시의 배후를 교란하게 하도록 미리 약속을 해두었고, 히데요시도 이에 맞서 시코쿠의 [[센고쿠 히데히사]], [[히젠 국]]의 [[우키타 히데이에]], [[가가 국]]의 [[마에다 도시이에]]를 각각 모리, 조소카베, 삿사와 맞서게 하는 등 철저하게 대비하였다.<ref name="이길진126">이길진, 126쪽 ~ 127</ref> 이에야스는 같은 시기 [[미노 국]] [[오가키 시|오가키]](大垣)의 [[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가 사위 [[모리 나가요시]](森長可)와 더불어 [[이누야마 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ref name="요시다68"/><ref name="이길진126"/> 고마키 산에 진을 친 후 하구로에서 모리 나가요시 군대를 격파하였다.<ref name="요시다68"/><ref name="이길진126"/> 그러자 히데요시는 3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마키 산 북쪽의 가쿠덴({{lang|ja|楽田}})에 진을 치고,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카쓰의 연합군과 장기적으로 대치하였다.<ref name="요시다68"/><ref name="이길진126"/><ref name="고미227">고미, 227쪽</ref> 같은 해 4월 9일 이에야스의 선제 기습으로 나가쿠테에서 히데요시의 선봉대가 궤멸당하자<ref name="요시다68"/> 다시 전투는 장기 지구전으로 바뀌었고, 11월에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카쓰와 강화를 맺음으로써 이에야스가 계속 싸울 명분이 사라지자<ref name="고미227"/><ref name="요시다69">요시다 외, 69쪽</ref> 차남 [[유키 히데야스|오기마루]]를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보내 강화를 맺었다.<ref name="요시다69"/> 그리고 강화 이후의 냉전 과정에서 전부터 히데요시와의 우호 관계를 건의해 오던 중신 [[이시카와 가즈마사]]가 히데요시의 설득을 받아 히데요시 측으로 출분하면서<ref>요시다 외, 70 ~ 71쪽</ref>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여동생 [[아사히히메]]<ref>히데요시는 이미 [[소에다 요시나리]]에게 시집간 아사히히메를 이에야스에게 시집보내기 위해 소에다 요시나리와 아사히히메를 강제로 이혼시켰다.</ref> 와의 정략 결혼을 거쳐 1586년 히데요시에게 형식적으로 신하의 예를 갖추고, 복종을 맹세하였다.<ref name="고미227"/><ref>요시다 외, 72 ~ 74쪽</ref>
 
신종 이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시코쿠와 규슈를 정벌하는 동안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거처를 하마마쓰에서 슨푸로 옮겼다.<ref name="이길진140">이길진, 140 ~ 142쪽</ref> 이에 앞서 1585년 이에야스는 슨푸에 성을 쌓는 공사를 시작했었다.<ref name="이길진140"/> 1590년, 시코쿠와 규슈를 완전히 평정한 히데요시는 천하 통일의 야망을 완수하기 위해, [[간토 지방|간핫슈]]({{lang|ja|関八州}})<ref group="주">[[무사시 국|무사시]]({{lang|ja|武蔵}})·[[사가미 국|사가미]](相模)·[[고즈케 국|고즈케]](上野)·[[시모쓰케 국|시모쓰케]](下野)·[[히타치 국|히타치]](常陸)·[[가즈사 국|가즈사]]({{lang|ja|上総}})·[[시모우사 국|시모우사]]({{lang|ja|下総}})·[[아와 국|아와]]({{lang|ja|安房}})의 여덟 구니를 말한다. 지금의 [[일본의 수도권|슈토켄]]을 형성하는 간토 평야 일대와 거의 일치한다.</ref>·[[도호쿠 지방|오우]]({{lang|ja|奥羽}})<ref group="주">[[무쓰 국|무쓰]]({{lang|ja|陸奥}})·[[데와 국|데와]]({{lang|ja|出羽}})의 두 구니를 말한다. 지금의 도호쿠 지방에 위치한 [[후쿠시마 현]]·[[미야기현]]·[[이와테 현]]·[[아오모리 현아오모리현]]·[[야마가타 현]]·[[아키타 현]]과 [[니가타현]]의 북동부 일부에 해당한다.</ref> 를 공격하기에 앞서 이에야스와 함께 [[오다와라 시|오다와라]](小田原)의 고호조(後北條)에게 신종을 요구하였다.<ref name="요시다76">요시다 외, 76쪽</ref> 그러나 호조는 히데요시에게 무리한 조건을 내세우고 군비를 증강하며, 히데요시의 가신 [[사나다 마사유키]]의 성을 점령하는 등 계속 히데요시를 자극하였다.<ref name="이길진143">이길진, 143 ~ 145쪽</ref> 그러자 히데요시는 20만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오다와라로 출격하였으며, 이에야스는 2만 8,000여명의 선발대를 이끌며 가장 먼저 오다와라로 진격하였다.<ref name="요시다76"/><ref name="이길진143"/> 호조는 [[오다와라 성]] 안에서 계속 농성전을 벌였는데, 오히려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주변의 보급로와 연락망을 봉쇄하는 고사작전을 통해 호조를 압박하였다.<ref name="이길진146">이길진, 146 ~ 148쪽</ref> 또 호조가 히데요시의 군대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던 중에 "아무리 논의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 토론"을 일컫는 오다와라 평정({{llang|ja|小田原評定|오다와라효조}})이라는 말이 생겨났다.<ref name="요시다76"/><ref>{{언어링크|ja}} [http://kotobank.jp/word/%E5%B0%8F%E7%94%B0%E5%8E%9F%E8%A9%95%E5%AE%9A 오다와라 평정] 고토뱅크</ref> 마침내 7월 5일,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성을 함락시켜 간토를 손에 넣고, 오우의 [[아이즈]]({{lang|ja|会津}})까지 점령해 오우 지역의 다이묘를 복종시켜, 100여년의 [[센고쿠 시대]]를 종식시키고 천하 통일을 완수하였다.<ref name="고미227"/><ref>요시다 외, 77쪽</ref>
 
[[파일:KokyoL0059.jpg|200픽셀|섬네일|왼쪽|지금의 [[고쿄]]인 [[에도 성]]의 이중교와 후시미 [[야구라|망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