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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아스카 시대(飛鳥時代), 에미시는 지금의 미야기 현 중부에서 야마가타 현 북쪽의 도호쿠 지방과, 홋카이도 대부분에 걸치는 넓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사이메이 천황 4년([[658년]])에 아베노 히라후(阿倍比羅夫)가 [[수군]](水軍) 180척을 이끌고 에미시를 토벌하였다. 야마토 정권의 지배영역이 북쪽으로 확대되면서, 차츰 방위를 위한 전쟁 등으로 조정과 충돌하기 시작했고, 가즈토가 쌓은 목책을 넘어 습격하기 시작했다. 가장 대규모 전투는 이사와(胆沢)와 그 주변에서 있었는데, 당시 에미시의 지도자로써 [[나라 시대]]인 [[호키]](宝亀) 11년([[780년]])에 다가 성(多賀城)이 에미시에게 일시 함락당한 호키의 난(宝亀の乱)에서의 고레하리노 아키마로(伊治呰麻呂), 헤이안 시대인 [[엔랴쿠]](延暦) 8년([[789년]])에 스부세(巣伏)에서 조정의 원정군을 궤멸시킨 아테루이(阿弖流為) 등이 알려져 있다. 조정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이를 진압하였고,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가 이사와 성(胆沢城)과 지바 성(志波城)을 쌓아 정복하였다. 이렇게 조정에 복속된 에미시를 [[후슈]](俘囚)라 불렀다.
 
헤이안 시대 전기인 9세기에 이르러 기나이(畿内)의 조정은 에미시에 대한 직접적인 정복 활동을 포기했고, 조정의 지배 영역 확대는 현재의 이와테 현과 [[아키타 현아키타현]]의 각각 중부 일대를 북쪽 한계로 정지했다. 그 뒤로는 현지의 조정 관료나 야마토화한 후슈의 수장들이 에미시의 부족 분쟁에 관여함으로써 서서히 야마토화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전9년의 역]], [[후3년의 역]] 등이 발발하면서 헤이안 후기 도호쿠 북부는 전란에 휘말렸는데, 당사자 중 오슈(무쓰) 아베 씨(奧州安倍氏)나 데와 기요하라 씨(出羽清原氏)는 스스로를 후슈장이라 자칭하면서 에미시와의 계보적 관련성을 주장하였지만, 반면 상대인 [[겐지]](源氏) 등은 에미시와는 전혀 무관한 채로 도호쿠에 이주한 집안으로 당시의 민족 상황의 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헤이안 말기가 되면, 에미시와의 혈연적 계보적 관계를 주장하는 [[오슈 후지와라 씨]](奥州藤原氏)의 지배가 도호쿠 북단까지 미치게 된다. 오슈 후지와라 씨의 초대 당주였던 [[후지와라노 기요히라]](藤原淸衡)는 자신이 중창한 주손지(中尊寺)의 공양원문에서 스스로를 「동이(東夷)의 원추(遠酋)」(東夷之遠酋), 「후슈의 우두머리」(俘囚之上頭)를 자처했고, 기요히라 이후 3대 [[후지와라노 히데히라|히데히라]](秀衡)까지 오슈 후지와라 씨의 당주는 주손지의 곤지키도(金色堂)에 미이라로 안치되었다. [[1950년]]대 이 미이라에 대한 고고학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 이 미이라에는 지문에는 와문이 많고 둥근 머리며 치아의 배열을 보아도 전형적인 일본인의 골격인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미이라에는 내장이나 뇌장이 전혀 없었고, 복부는 만곡 형태로 절개되고 후두부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틈틈이 쥐가 갉아먹은 듯한 모양이 붙어 있어, 하세베 코토히토(長谷部言人)는 미이라는 자연발생했다고 주장하며 후지와라 3대는 일본인이라 주장하였다. 반면 후루와타 네모토(古畑種基)는 미이라의 인공 가공설을 주장했다. 미이라가 안치된 목관 3개 모두 뒤통수와 항문이 닿는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고, 절개된 단면은 깨끗하고 오물이 유출한 흔적은 없으며 성기는 절개되어 가공의 흔적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지극히 아이누적인 관행으로써, 사할린 아이누는 위대한 추장이 죽으면 근친자들이 그 시신의 뇌와 내장을 제거하고 몇 번이나 소금물에 담가서 햇볕에 말려 미이라(우후이)로 만든다. 모리 카헤(森嘉兵衛)는 에미시와 일본인 사이의 몇 대에 걸친 혼인으로 골격 등 신체는 일본인화되기는 했지만 의식(意識)이나 장례의 관행 등의 문화는 아이누적인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던 것 아닐까 설명하고 있다.
 
오슈 후지와라 씨가 겐지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거느린 간토 지방의 가마쿠라 정권(鎌倉政権)에 멸망당하고, 막부는 도호쿠 지방 각지에 도고쿠 고케닌들을 파견해, 이곳에 에미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가마쿠라 막부에 의한 지배가 시작되어, 도호쿠 북단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 이후 에미시, 후슈 등이라 불리던 민족적 개념들은 문헌에서 자취를 감추고, 차츰 「에조」로 바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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