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텍스트 제거- 없어도 전혀 상관 없는 말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요소, 없어도 이해하는데 전혀 지장없는 말 제거
116번째 줄:
 
== 1741년 보헤미아의 동맹군 ==
프랑스군은 별다른 문제없이 [[도나우 강]]에서 바이에른의 선제후가 지휘하는 군대와 합류했고, [[빈]]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군 와중에 갑자기 목표가 변경되었다. 대오스트리아 동맹군들은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더니 결국 각자 [[프라하]](Prague)를 목표로 하는 세 개의 군단을 구성하였다. 프랑스 군단은 [[암베르크]](Amberg)와 [[필센]](Pilsen)을 거쳐 진군하기로 하였다. 선제후는 [[체스케부데요비체|부트바이스]](Budweis)로 출발하였다. 막 동맹에 참가한 작센군은 엘베 계곡을 거쳐 보헤미아를 공략하기로 하였다. 오스트리아군은 처음에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머지않아 도나우 강과 동맹군 사이에 있는 타보르(Tábor)에서타보르에서 상당한 수의 군세가 집결하여 동맹군을 저지하였다. 슐레지엔 전역에 참여하던 [[빌헬름 라인하르트 폰 나이페르크|나이페르크]] 장군 역시 보헤미아를 구원하기 위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이페르크 장군은 프리드리히(Frederick) 대왕과 클라인 슈넬렌도르프(Klein Schnellendorf)에서슈넬렌도르프에서 흥미로운 조약을 맺어(1741년 10월 9일) 형식적인 공성전을 통해 나이세(Neisse)를 넘겨주고 오스트리아군은 프리드리히 대왕이 나이세를 얻은 대가로 [[빌헬름 라인하르트 폰 나이페르크|나이페르크]]의 군세가 어디로 이동하든 가만히 놔두었기 때문에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퇴각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동시에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의테레지아의 개인적인 매력에 격정적인 감동을 받은 헝가리 인들은 봉기(levée en masse)하여봉기하여 정규군에 매우 귀중한 경무장 부대로서 참여하였다. 빈에서 야전 사령관 [[루드비히 안드레아스 폰 케벤휠러|케벤휠러]](Khevenhüller) 휘하의 새로운 군단이 구성되었으며, 오스트리아군은 보헤미아에 있는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과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경계를 지키기 위해 도나우 강가에 배치된 소규모의 바이에른 군에 대하여 공세로 나아가 겨울 전역을 벌이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는 동안 프랑스군은 1741년 11월 26일 프라하에 강습을 가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부군 프란츠(Francis) 대공은 당시 보헤미아에 위치한 오스트리아군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너무 느리게 움직였기 때문에 요새를 구원하지 못했다. 이제 스스로를 오스트리아 대공(Archduke of Austria)이라고대공이라고 서명하던 바이에른의 선제후는 1741년 11월 9일 보헤미아의 왕(King of Bohemia)으로왕으로 즉위하고 1742년 1월 24일 [[카를 7세로서7세]]로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외에 다른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11월 동안 보헤미아 전역에서는 소규모 전투만 계속되었다. [[도나우 강에서강]]에서 당시 오스트리아군 가운데 최고라 칭해질만한 장군이던 케벤휠러는 11월 27일 진군하여 서서히 동맹군을 몰아내 이들을 [[린츠]](Linz)에 가둬두었으며, 바이에른 영내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뮌헨]](Munich)은 카를 7세의 대관식 날 오스트리아에 항복하였다.
 
1741년의 보헤미아 전역이 끝나갈 무렵, 프랑스의 노장 원수 [[브로이 공작 1세 프랑수아 마리|드 브로이]](de Broglie)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중앙 보헤미아에 불확실하게나마 거점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오스트리아군의 주력에 의해 위협받고 있었다. 케벤휠러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에 저항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으며 프리드리히 대왕은 비밀조약을 지키며 여전히 슐레지엔에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 1742년 전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