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양동마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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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부터 조선사회와 중앙정계를 지배한 사림들 중에서 매우 앞선 시기인 세조5년(1459년)에 이 마을의 손소공이 문과에 급제하고 중앙정치 무대에 진출하여 이시애의 난을 진압할 때 공을 세워 공신이 되고, 이어서 그의 둘째 아들인 손중돈 선생이 성종 20년(148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 우참찬 등 40여년 동안 요직을 두루 거치고 청백리에 올랐다.
 
대유학자이자 경세가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 선생은 성리학의 이기철학을 이황에 앞서 최초로 이론적 체계를 세우고 조선조 성리학의 기초를 다짐으로서 [[영남학파]]의 창시자가 되어 [[이황]]에게 영향을 주는 등 해동부자라 불리어 지고 동방5현의 한분으로 추앙을 받으면서 종묘배향과[[문묘]]와 문묘에[[종묘]]에 종사되어 공자와 역대 임금임금의 및 공자와위패와 함께 위패가 모셔지는 영광을 누렸다. 전국의 향교와 20여 개소의 서원에 배향이되기도 했다.
 
손씨, 이씨를 합쳐서 문과 26명, 무과 14명, 사마 76명으로 과거 급제자가 총116명이나 되고, 음직은 부지기수였을 정도로 많은 인물이 배출됨으로써 전국에서 가장 이름난 양반마을로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