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우치 가즈토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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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생과 "야마우치 가즈토요"의 읽기 ==
=== 태생 ===
가즈토요가 태어난 야마우치 일족의 출신에 대해서는 에도 시대 후반에 작성되었던 "간세이 중수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에 도사 번이 제출했던 내용에 따르면 [[후지와라노 히데사토]](藤原秀郷)의 자손인 슈도(首藤) 야마우치 일족의 분명한 후예는 센고쿠 시대 당시에는 다르게 빈고(備後)에 존재하고(이 야마우치 일족은 그 후 모리(毛利) 가문에 종속해, 에도 시대까지 이어진다)있는 한편, 가쓰토요의 야마우치 일족은 증조부 이전부터 8대에 해당하는 사람의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았고, 정말로 슈도 야마우치의 후예인가 하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 또 [[아이즈 (후쿠시마현)|아이즈]](会津) 지방에서는 아시나(蘆名) 일족을 섬겼던 야마우치 가문(슈도 야마우치 일족의 서류)의 아들이 유랑하다 노부나가를 섬겼다는 것이 가즈토요라고 하는 전승도 있으나, 이것은 오와리 시대의 가즈토요의 사적과 합치하지 않기 때문에 부정되고 있다.
 
가즈토요의 [[야마우치 씨|야마우치 가문]]이 [[오와리 국]](尾張国)에 이름을 나타내게 된 것은 가즈토요의 조부ᆞ[[야마우치 히사토요]]부터 라고 생각된다. 그 이전에 대해서는 [[단바 국|단바]](丹波) [[산노미야 성]](三宮城) 근처를 거점으로 하고 있던 소호족에 해당한다고 여겨지고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그 가능성을 암시하는 사료는 남아 있다.). 단 가즈토요의 아버지 · 모리토요에 대해서는 오와리 [[가미시 군]](上四郡)을 지배하는 [[슈고다이]](守護代) · 이와쿠라 오다 일족에 중신으로서 섬기고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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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마우치 가즈토요의 읽기 ===
"야마우치(山内)"의 읽기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 참고서나 사전등에서는 "야마노우치"라는 훈으로 여겨져 왔다. 이것은, 먼저 썼던 대로 도사 야마우치 일족이 조상이라고 하는 슈도 야마노우치씨가 "야마노우치"라고 읽은 것에 의한다. 현재에 슈도 야마노우치 일족이 성씨의 근본으로 했던 [[가마쿠라]](鎌倉) · 야마노우치 조(山内庄)의 지명은 "야마노우치"라고 읽는다.
한편, 가즈토요의 야마우치 일족은 이미 나온 "간세이쵸우슈제가보"에서는 "야마우치"라고 히라가나로 달려있다달려 있다. 또 [[요도도노]](淀殿)의 시녀인 오쿠라쿄노 쓰보네(大蔵卿局)가 가즈토요를 향해 보냈던 서간이 현재도 야마우치 가문에 남아있으나 그 행선지는 히라가나로 "야마우치 쓰시마도노" 라고 되어 있어, 이러한 점들로부터 최근에는 "야마우치" 라고 읽는 것이 올바른 것이 아닐까올바르다고 생각되고 있다.
 
다음에 "가즈토요(一豊)"의 읽기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가즈토요" 라고 읽어오고 있었으나, 가즈토요가 이름을 가신에게 주었을 때의 읽기로부터때부터 "가쓰토요" 였다고 실제로는읽혔다고 고려되고 있다.
 
[[2006년]]에 방송되었던 [[NHK 대하드라마]] [[공명의 갈림길]](功名が辻)에서는 "가쓰토요", "가즈토요" 어느 것으로 읽을 것인가 제작사이드에서도 끝까지 문제가 되었다. 이것에 대해서, 현재의 야마우치 가문으로부터 "친근한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라는 메시지가 있어서 "야마우치 가즈토요" 라고 읽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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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에는 히데쓰구의 숙로격이었던 제 다이묘와 함께 출병을 면했지만, 군선의 제조나 [[후시미 성]](伏見城)의 보청 등을 담당해 인부를 바쳤다. [[분로쿠]](文禄) 4년([[1595년]])에는 히데쓰구가 모반 혐의로 처형되어, 가쓰토요와 함께 히데쓰구를 섬기던 중신인 [[와타라세 시게아키]](渡瀬繁詮)가 히데쓰구를 변호하기 위해 할복하였다. 그러나 가쓰토요는 다른 숙로인 나카무라ᆞ호리오 등과 함께 무관계의 입장을 관찰해, 연좌를 면하였다. 이 때에 히데쓰구의 소령으로부터 8000석을 가증받았다.
 
히데요시의 사후인 [[게이초]](慶長) 5년([[1600년]])에는 [[고다이로]](五大老)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겨 [[아이즈 (후쿠시마현)|아이즈]]의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의 토벌에 참가해, 이에야스가 비운 사이에 [[고부교]](五奉行)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등이 거병하자 동군에 가담하였다. 이 사이에, 가쓰토요는 [[시모쓰케 국]](下野国) 오야마(小山)에서 있었던 군의에서 제장이 동군, 서군에의 거취를 방황하는 중에, 맨 먼저 자신의 거성인 [[가케가와 성]](掛川城)을 이에야스에게 제공하는 뜻을 발언해 환심을 샀다. 이 거성을 제공하는 안은 호리오 다다우지와 사전에 협의했을 때에는 호리오가 제안하기로 한 것을 가로챘다고 한다.([[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번한보(藩翰譜)" 단 [[도카이]](東海)도 출신의 다른 다이묘인 나카무라 가즈우지가 죽음의 문턱에 있었고, 동시에 다다우지의 아버지 호리오 요시하루도 자객에게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 있던 등 노련한 세대가 행동력을 잃고 있는 가운데 주변의 세력이 동군에 붙는 것을 가즈토요가 적극적으로 정리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미카와 국]](三河国) [[요시다 성 (도요하시 시)|요시다 성]](吉田城)의 성주인 [[이케다 데루마사]](池田輝政)등도 이 시기, 가쓰토요와 가끔 접촉하고 있어, 이런한 협의를 하고 있었다고 고려되고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본전에서는 모리(毛利)·조소카베(長宗我部)군 등의 견제를 담당해, 이렇다할 공훈은 없었지만 전투 전의 공적을 높게 평가받아 도사 국 1국·9만 8000석(다이코 검지의 때에 조소카베 일족이 제출했던 석고, 후에 야마우치 일족 자신의 검지에서 20만 6000석여의 석고를 보고하였다.)을 받았다.
 
=== 도사 1국의 영주로서 ===
게이초 6년([[1601년]])에 영지가 가게가와로부터 도사로 이동되어 [[우라토 성]](浦戸城)에 입성하였다. 대폭적인 가증이 있어 딴 곳으로부터 들어왔던 다이묘는 그렇지 않아도 일손도 부족하게 되므로 현지에 있어 원래 가신을 고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일령구족|이치료구소쿠]](一領具足)을 중심으로 하는 옛 조소카베 일족의 무사<ref>각지에서 그을림이 남아 이 과제(이전부터의 야마우치 가문의 가신을 상사, 옛 조소카베 일족의 가신을 향사(郷士)로 하는 차별적 취급)은 2대부터 [[막말]]까지 계속 이어졌다. 향사 출신에는 막부 말기에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등의 인물이 태어나게 된다.</ref>의 다수는 신영주에 반발해 도사 국 내에서 많은 분쟁(옛 주군 [[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氏)의 복귀를 원하는 등)을 일으켰다. 이것에 대해 가즈토요는 중요한 포스트를 외부로부터 들어온 인재로 굳혀, 다네키하마에서의 토벌등 어디까지나 무단조취를 취해, 이것에 대등했다. 이 때문에 목숨을 위협받는 위험성이 있어 축성을 했을 때에는 5명의 [[가게무샤]](影武者)와 함께 현지를 시찰했다.(가게무샤의 존재등은 기밀사항이었기 때문에 통상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으나, 가즈토요의 경우에는 명기되어 있는 희귀한 사례이다.) 또 고치평야 내의 오타카사카 산(大高坂山)에 통치의 중심거점으로서 고치성을 축성해(부교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 낭인이 된 [[도도 쓰나이에]](百々綱家)을 7000석으로 초빙해, 게이쵸 8년([[1603년]])에 완성한다.) 성 아래 마을의 정비를 행했다. 또, 이 때의 관위가 종 4위하 도사노카미(土佐守)로 나아갔다.
 
또, 영내 백성에 대해 식중독을 신경써신경 써 가다랑어를 회로 먹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것에그러자 대해, 백성들이백성들은 이것의가다랑어의 표면만 구워 회가 아니다라고아니라고 하는주장하는 음식이 되었다.나타났으며, 이것이 가다랑어 다짐(タタキ)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전해진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