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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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airo conference.jpg|thumb|left|카이로 회담 당시 태평양 전쟁의 연합군 지도자. 왼쪽부터 총통 장제스,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총리 윈스턴 처칠]]
 
미드웨이 전투 이후 향후 2년 간 전쟁의 향방이 결정되었다. 미국은 이 무렵 방대한 산업적 잠재력을 바탕으로 전함, 전투기, 그리고 조종사의 수를 증카시키는데 집중했다.{{sfn|Evans|Peattie|1997|p=491}} 한편 일본은 산업 기지와 기술적 전략, 조종사 훈련 제도, 그리고 해군의 자원 등이 미비되어마비되어 미국과의 전쟁에서 뒤처지게 되었다. 전략적인 의미에서 연합군은 태평양 일대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니미츠 제독의 주도 하에 섬 도약 작전이 시작되었지만, 모든 일본군의 거점이 점령돼야 할 필요는 없었다. 타이완, 라바울, 트럭과 같은 섬은 공중 공격으로 무장해제된 채 통과되었다. 태평양에서의 목표는 일본 본토에 최대한 근접하여 대규모 전략적 공습을 개시하고 잠수함으로 본토를 차단한 후 필요하다면 일본 본토를 침공하는 것이었다.
 
1943년 11월 미군은 [[타라와 전투]]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것은 연합군이 그들의 실수로부터 배우고, 사전 폭격이나 포격 등을 통해 기술적인 변화를 유도했으며 조수와 상륙 주정의 일정을 고려해 계획을 짜는 것과 같은 상륙 작전의 전반적인 기술 향상에 도움을 주었다. 미국 해군은 일본 해군과 전면전을 벌일 마음이 없었다. 연합군의 진격은 일본 해군에 의해서만 중단될 수 있었는데, 일본 해군은 석유의 부족으로 이를 실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ref name=japanesemm/><ref name=bla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