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고 (후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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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후한 이전 [[전한]]의 유사를 두루 채집하여 《후전(後傳)》 수십 편을 짓는 등 훌륭한 역사가로
건무 30년([[54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반고는 태학에서 돌아와
) 1백 편의 저술을
명제는 반고의 재능을 높이 사서 그를 난대령사(蘭台令史)로 삼고, 조를 받들어 진종(陳宗), 이민(伊敏), 맹이(孟異) 등과 함께 《세조본기》(世祖本纪) 및 여러 전기(傳記)를 짓게 했다. 반고는 후에 낭(郎)으로 옮겨지고, 전교비서(典校秘書)로서 다시 공신(功臣), 평림(平林), 신시(新市), 공손술(公孙述) 등의 열전을 짓게 되었다. 당시 반고와 같은 난대령사를 맡고 있던 부의(傅毅)도 반고와 함께 나란히 문장으로서 이름을 떨쳤는데, 반고는 반초에게 보낸 글에서 "무중(武仲)은 속문(屬文)에 능해서 난대령사가 되었는데 그 붓이 종이에 한 번 닿으면 쉬는 법이 없다"고 평한다. 반고 또한 조칙을 받들어 그 아버지가 해왔던 저술작업을
장제(章帝)는 반고를 현무사마(玄武司馬)로 임명했다. 건초(建初) 4년([[79년]]) 장제는 전한 [[전한 선제|선제]](宣帝)의 석거각(石渠閣)의 고사를 본받아 여러 왕(王)과 조박(趙博), 이육(李育) 등의 유생들을 백호관(白虎觀)에 불러모아 [[오경]](五經)의 다르고 같음을 강론하게 했는데, 이 대대적인 [[유학]](儒學) [[세미나]]의 토론
화제(和帝) 영원(永元) 원년([[89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반고는 관직을 사임하고 집에 있었는데, 마침 두헌(竇憲)이 병사를 거느리고 [[흉노]]를 치게 되자 반고도 두헌의 군에 종군하여 중호군(中護軍)으로서 중랑장(中郎將)의 임무를 수행했다. 흉노를 크게 쳐부순 뒤 늑석연연산(勒石燕然山)에 그 공적을 새기는 명문을 짓고 쓴 것이 바로 반고였다. 반고는 또한 《두장군북정송》(竇將軍北征頌)을 지어 두정이 북쪽으로 흉노를 정벌한 사실을 크게 찬양하였다.
그러나 예전에 반고의 집안 노비에게
결국 한서(漢書)는 [[반표]]로부터 아들 반고, 그리고 딸인 [[반소]]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족이 참여하여 집필된 것이다. 유일하게 [[반초]]는 언급되지 않는데, [[반초]]는 평생 [[서역]]을 지키며, [[흉노족]]과 [[서역]]을 개척하는 데 일생을 바쳤기 때문이다. 본기(本紀) 12편에 표(表) 8편, 지(志) 10편, 열전(列傳) 70편으로 되어 있던 원래의 《한서》 체제는 훗날 다시 120권으로 나뉘어, 《[[사기]]》(史記)의 체제와는 달리 세가(世家)는 모두 빠지게 되었다.
또한 반고는 한의 주된 시문학 양식이자 산문시의 일종인 부(賦)를 지었는데 일부가 후세에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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