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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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도덕경으로 규정한 판본은 삼국시대 말기에 [[왕필]]이 정리한 것이며, 이를 소위 왕필본 혹은 통용본이라고 부른다.
 
1973년도에 중국 장시성에서[[장시 성|장시성]]에서 발견된 고분 마왕퇴(BC 168년 추정)에서 발굴된 백서본에 담겨있는 문장들은 왕필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불어 마왕퇴에서 발견된 도덕경 판본은 중국 삼국시대 말기에 왕필이 편집한 통용본보다 연대가 훨씬 앞섰다. 다시 말하자면, 왕필본의 저본이 바로 백서본인 셈이며, 왕필이 정리하기 이전에 중국의 여러 사서에 인용된 판본도 이 백서본인 셈이다. 백서본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백서본 갑본으로서 전국시대 말기(BC 247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을본은 한나라 초기(BC 195년 이전)에 제작된 판본으로 추정된다.<ref>이석명 역, ''백서 노자''(2003). 청계. ISBN 89-88473-60-4</ref>
 
1993년 중국 화북성의[[허베이 성|화북성]]의 곽점촌에서 발견된 곽점본(혹은 죽간본, BC 300년 추정)은 백서본에는 있는 중요한 시문들이 많이 빠져있으나, 백서본에는 없는 내용의내용 일부가 있어 새로운 텍스트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곽점본과 백서본의 주요한 차이는 다음과 같다.
# 곽점본은 대나무에 쓰여진쓰인 반면에 백서본은 비단에 쓰여졌다쓰였다.
# 곽점본의 내용 상당수가 백서본에는 없으며, 백서본에 없는 내용 일부가 곽점본에 있다. 곽점본은 2000여자로2,000여자로 백서본의 40% 정도의 분량이다.
# 곽점본에 비해 백서본의 내용에는 조금씩 추가된 것들이 있으며 문장 형태가 말끔해지는 경향이 있다.
# 백서본에는 전사과정의 기본적인 오류와 원래는 주석이었으나 옮기는 과정에서 본문으로 들어간 오류 등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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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서본은 왕필본에 비해 허사가 많이 남아있어 왕필본의 끊어읽기 문제를 다소 해결해준다.
 
곽점본과 백서본 그리고 왕필본의 차이만 보아도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전설처럼 노자가 함곡관을 넘으면서 도덕경 5000여자를5,000여 자를 남겼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도덕경은 일거에 성립된 것이 아니고 고대부터 전국시대 말기를 거치면서 발생한 여러 생각들과생각과 사상들이 응축되어 성립된 책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복잡한 성립과정은 도덕경 안에 여러 모순된 사상이 뒤섞여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때문에따라서 도덕경은 동양사상의 명실상부한 근간이며, 시쳇말로 말하면 여러 사상들의사상의 발전의 시작점이 되는 떡밥이 던져진 것이다. 도덕경에 모순과 여러 사상들이사상이 뒤섞여 잇는있는 만큼, 여러 사상가들과사상가와 학자마다 도덕경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는데, 하상공장구는 양생술을 위한 음양사상의 기본 경전으로서 여겼고, 왕필주는 도덕경에 담긴 형이상학적인 면모를 흠모하여 신비주의학적으로 여겼으며, 그 외에도 여러 학자들과학자와 사상가들이 저마다 무위자연주의, 반유가주의, 반법가주의, 음양가 사상, 무정부주의, 병가 사상들의 근간이 되는 저서로 여겼다.
 
== 한국으로의 유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