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연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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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ISBN 9788971990117
|장=송병준 : 이완용과 쌍벽을 이룬 친일매국노 제1호 (강창일)
|쪽=63쪽}}</ref> 사건 후 같은 을미사변 관련자들인 [[이두황]], [[우범선]] 등과 함께 체포령을 피해 [[일본]]으로 피신했다. 처음에는 [[히로시마 시|히로시마]], [[교토 시|교토]]로 도망쳤다가, 명성황후 시해 주범인 [[미우라 고로]] 등이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오자 [[도쿄]]로 이동하여 일본 정부의 비호 아래 망명 생활을 하였다. 1896년 4월 농상공부 광산국 기사가 되었다. 그러나 다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1904년]] [[4월]] 중순 [[조선 고종|고종]]은 주한일본국공사관에 조선인 출신 정치적 [[난민]] 신청자 중 구연수, [[박영효]], [[유길준]], [[장박]], [[조희연]], [[이두황]], [[이진호]], [[권동진]], [[정란교]], [[이규완]], 이범래, 신응희 등 14명을 [[일본]]에서 추방하고, 나머지 다른 망명객은 송환할 것을 요청하였다. 주한일본공사는 [[4월 14일]]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했는데 일본 정부에서는 이들의 송환을 거절하였다.
 
[[1906년]] [[한성부]]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듬해 [[대한제국 순종]]의 즉위로 특사가 단행되면서 명성황후 시해범들도 사면되었다. 귀국한 그는 통감부 경시, [[조선총독부]] 경무관, 경무국 칙임사무관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경찰 최고 직급인 경무관에 임명된 조선인은 구연수 외에 아직까지 알려진 인물이 없어, 일제의 강한 신임을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ref>{{서적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