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조제프 프루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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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ierre Joseph Proudhon.jpg|thumb|200px|프루동]]
'''피에르조제프피에르 조제프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1809년]] [[1월 15일]] ~ [[1865년]] [[1월 19일]])은 [[프랑스]]의 [[:en:Mutualism (economic theory)|상호주의]] [[철학자]]이자 언론인이었다[[저널리스트|언론인]]이었다. 프루동은 스스로를 '[[아나키스트]]'({{llang|fr|anarchiste}})라고 칭한 최초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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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를 마르크스와의 교류 ===
그는 [[1843년]] 자신의 인쇄소를 팔고 수상 운수회사에서 승무원으로 일하면서 [[카를 마르크스]]와 [[바쿠닌]]을 알게 되었다. 프루동이 [[1842년]] 쓴 《경제적 모순의 체계, 혹은 빈곤의 철학》에 대해, 카를 마르크스가 《철학의 빈곤》으로 비판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매우 나빠졌다. 마르크스는 프루동을 사회주의자로서 매우 존중했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프루동의 이론은 논리적 근거가 빈약했다.
 
=== 정치활동과 망명 ===
프루동은 [[1848년]] [[혁명]]이 일어난 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민중〉(Le Peuple)지에 [[나폴레옹 3세]]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3년의 징역과 3,000프랑의 벌금을 선고받고 [[벨기에]]로 피신했다[[망명]]했다. 그는 파리에 돌아와 체포되어 생트펠라지 감옥에 투옥되어 [[1852년]] 석방됐다. 그는 생트펠라지에서 외프라지 피에가르(Euphrasie Piegard)와 [[결혼]]했으며 《혁명가의 고백》과 〈민중의 목소리〉를 썼으나 다시 기소되어 다른 감옥으로 이송된다. 그는 [[1858년]]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한《혁명과 교회의 정의론》으로 다시 3년의 징역과 4,000프랑의 벌금을 선고받아 [[브뤼셀]]로 피신하여망명하여 이때 [[레프 톨스토이]]를 만난다.<ref>통합유럽연구회《인물로 보는 유럽통합사 》(책과함께,P61)(</ref> [[1862년]] 그는 파리로 돌아와서 《소유의 이론》과《노동계급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를 썼다. 그는 [[1865년]]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 사상 ==